요한복음 11:28-35 강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주께서 눈물을 흘리시다 요한복음 11장 28절에서 3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만나시고,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는 깊은 공감과 사랑, 그리고 장차 있을 부활을 앞두고 흐르시는 주님의 눈물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은 감정적 동정 이상의 신학적 깊이를 담고 있으며, 예수님의 인성, 신성, 그리고 구속사적 역할이 교차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조용한 부르심, 즉각적인 응답 28절은 마르다가 마리아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여기서 “가만히”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라휄’(λαθρα), 은밀하게, 비밀스럽게를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아직 공적으로 무덤에 가시기 전에 마리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시려는 배려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친밀하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해 한 사람의 아픔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만, 주님의 시선은 지금 고통 중에 있는 한 영혼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구체적이며, 하나하나의 부르심은 사랑의 의지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즉시 가서 마리아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마리아는 “곧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9절). 이 ‘곧’이라는 부사는 헬라어 ‘타쿠스’(ταχὺ)로, 망설임 없는 순종과 응답을 나타냅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반응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 고통 중에서도 주님을 향한 반응성을 지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성숙함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황이 아무리 무거워도, 주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는 이 순종이야말로 믿음의 진정한 증거입니다. 깊은 공감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주님 30절은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하던 곳에 ...

요한복음 11:17-27 강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장 17절에서 27절은 나사로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과 마르다가 나눈 깊은 신앙적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절망 앞에서 예수님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 자체를 선언하십니다. 본문은 신자의 부활 신앙이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깊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나흘이 지난 무덤 앞, 마르다의 절제된 믿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는 상황으로 시작됩니다. 17절의 이 표현은 단순한 시간 정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부활 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전통에는 사람이 죽은 후 사흘까지는 혼이 시신 주위를 맴돈다고 믿었고, 사흘이 지나면 진정한 죽음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므로 나흘째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18절과 19절에서 베다니와 예루살렘의 가까운 거리,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왔다는 사실은 나사로의 죽음이 단지 가족의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이 배경은 뒤이어 펼쳐질 예수님의 선언이 단순한 가족 위로가 아니라, 공개적 계시의 장이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20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장 나아갑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집에 머물렀다고 기록됩니다. 이 대비는 요한복음이 즐겨 사용하는 인물 간의 신앙 반응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식입니다. 마르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며, 그의 대화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고백으로 발전합니다. 21절에서 마르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는 원망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임재가 생명을 지킬 수 있었음을 믿고 있었고, 그 신뢰는 죽음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22절에서 “지금이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한복음 11:5-16 강해, 나사로가 잠들었다

  하나님의 시간, 그리고 믿음의 길 요한복음 11:5-16은 나사로의 죽음을 둘러싼 예수님의 반응과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이해 사이의 간극을 조명해 줍니다. 특히 예수님의 의도적인 지연과 도마의 고백은 우리에게 믿음이란 무엇이며, 그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즉각적인 해결이 아니라,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한 기다림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시되 곧바로 가지 않으신 주님 5절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에가파’(ἠγάπα)—아가페 사랑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조건 없는 헌신적 사랑을 뜻합니다. 단지 감정적 애착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헌신과 선하신 의지를 담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6절은 이 사랑의 방향을 예상과 다르게 펼쳐 보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신다고 하셨지만 곧바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때 인간적인 감정으로 주님을 이해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신다면 바로 가셔서 고쳐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연은 무관심이나 소극적 반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지연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 곧 섭리의 역사 속에서 더 큰 영광을 위해 설계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때로 우리의 조급함을 견디게 하며,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섭리의 신뢰’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긴급성과 다르게 흐르며, 그분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모든 일이 아름답게 성취됩니다. 낮이 아니냐: 하나님의 인도 아래 걷는 길 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8절에서 깜짝 놀라며 말립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들의 반응...

요한복음 11:1-4 강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나사로의 부활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 첫 부분인 1절부터 4절까지는 병든 나사로의 상황과 예수님의 반응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짧은 본문은 인간적인 절박함과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가 교차하는 장면이며, 믿음과 기다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병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병든 자가 있다는 정보가 아니라, 그가 누구의 가족인지, 어디에 사는지까지 상세히 소개된다는 점입니다. 요한은 단순한 병자 나사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관계된 가정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2절은 그 마리아가 바로 주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던 마리아라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 사건이 요한복음 12장에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독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묘사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의 이야기가 이미 신앙 공동체 내에 깊이 각인된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이 가정이 예수님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아픔은 주님께 단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속에 있는 이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하나님 백성의 삶에도 고난이 스며든다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이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자들에게도 고난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님께 보내는 절박한 요청 3절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메시지를 요약합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이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간절한 호소입...

요한복음 10:22-39 강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22-39은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결정적 선언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넘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이며, 동시에 양들을 향한 보호와 생명의 확증이 함께 드러나는 장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 기반 위에 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정체 선언 본문은 유대인의 절기 중 하나인 수전절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수전절은 마카비 시대의 성전 정화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예루살렘 성전 중심에서 거행되는 절기였습니다. 바로 그 성전 뜰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애워싸며 질문합니다. “당신이 메시아이면 밝히 말하소서.”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적 언사와 상징적인 말씀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단도직입적으로 그 정체를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미 대답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2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신 이 표현은,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통해 충분히 그리스도의 정체를 계시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헬라어 ‘레로카’(εἶπον, 내가 말했다)는 완료 시제로, 예수님이 단회적으로 말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 왔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말의 명확성이나 정보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믿지 않음’이었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특징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은 믿지 않아서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이미 양이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말하는 유기(遺棄)와 선택의 교리이며, 은혜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는 본문입니다. 나의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2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19-21 강해, 성령의 조명

  성령의 조명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 요한복음 10:19-21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 비유를 말씀하신 직후의 반응을 다룹니다. 이 짧은 구절이지만,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 대한 사람들의 분열된 반응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있는 갈등을 드러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은 곧 신앙의 생명 여부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본문의 배경과 구조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단지 도덕적 선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의 영적 함의—특히 구약에서 하나님 자신이 목자로 묘사된 구절들(시 23:1, 겔 34:11-16 등)을 통해,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본문 19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스키스마”(σχίσμα)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서 분열, 단절, 갈라섬을 의미하는 강한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흥미로운 주장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면을 갈라놓는 진리의 검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친 자인가, 귀신 들린 자인가 20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여기서 “귀신 들렸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다이모니온 에케이”(δαιμόνιον ἔχει)인데, 이는 단순히 심리적 이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중대한 비정상을 의미합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사탄적인 영향력으로 돌려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불신앙이 단순한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의지적이고 고의적인 거부의 열매임을 보게 됩니다. 칼빈은 이 대목에서, 사람의 마음이 완악함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들을 능력을 상실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항상 기쁘고 은혜로운 소식이 ...

요한복음 10:40-42 강해, 세례 받으신 곳

  요단강 건너편, 다시 처음으로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선한 목자 되심과 유대인들과의 치열한 논쟁, 그리고 신성과 권위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그 절정 이후, 본문 40-42절은 조용하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곳은 사역이 시작된 곳,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자리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갈등을 피한 후의 후퇴 같지만, 이 장면은 주님의 사역이 결코 사람의 반응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때에 따라 진리의 빛이 미묘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시다 40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서 거기 거하시니.”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팔린’(πάλιν, 다시)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의도적인 회귀, 곧 의미 있는 장소로의 귀환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십니다. 이는 단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사역의 출발점에서 다시금 사역의 방향성과 근거를 확인하시는 상징적인 행보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영광의 시간'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격한 논쟁과 돌을 드는 자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이후, 주님은 다시 사람들의 마음이 준비된 자리로 가십니다. 그곳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했던 자리요,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며 마음을 열었던 장소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은 다시 가십니다. 그분은 결코 물러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불신이 가득한 곳에서는 말씀이 더 이상 자라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그 말씀은 반드시 옥토에 떨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거절 속에서도 한결같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