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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 묵상,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첫 표적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기적으로 기록된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입니다. 단순히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를 회복시키는 사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복음의 상징이며, 요한복음 전체의 표적 신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복된 주님의 사역의 시작은 창조적 능력입니다.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가나의 혼인잔치와 인간의 결핍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1절) 여기서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은 앞선 1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간 흐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구조를 모티프로 삼아 첫 장에서부터 시간의 흐름을 세밀히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새 창조’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유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행사였습니다. 이 잔치는 단지 두 사람의 결혼식이 아니라, 두 가문의 명예와 지역 사회의 결속을 나타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잔치 전체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포도주는 단지 음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 축복,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시편 104편 15절에서는 포도주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께 나아가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합니다(3절). 여기서 마리아의 요청은 단순히 상황의 전달이 아니라, 예수님께 뭔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기대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

요한복음 1:51 묵상,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리라 요한복음 1장 51절은 나다나엘의 신앙 고백 이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요한복음 1장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닌, 구속사의 핵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보여주는 심오한 계시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하나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는지를 깊이 있게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야곱 사건을 상기 시키심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알려 줍니다. 인자 위에 임하는 사닥다리: 야곱의 꿈의 성취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이 말씀은 분명히 구약의 한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을 때, 그는 꿈속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고,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을 새롭게 하셨고,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며 베델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사닥다리가 바로 자신임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즉,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통로,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참된 중보자가 바로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예수님이 자주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신 호칭으로, 다니엘서 7장에서 인용된 표현이며,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이자 종말적 통치자로서의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떤 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구속사의 핵심 선언입니다. 야곱이 보았던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는 단지 하나의 예표에 불과했고, 이제 그 예표가 실제로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길이 되신...

요한복음 1:49 묵상, 나다나엘의 예수님을 향해 고백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장 49절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해 고백한 말씀입니다. 단 한 마디 고백 속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고, 이 고백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예언과 메시아 기대 속에서 나온 신학적인 고백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또 우리 입술의 고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해 보니다. 신앙 고백의 시작: 예수님에 대한 인식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이 고백을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는 한 마디 말씀 앞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셨을 때,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심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즉시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직감이나 감정의 반응이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잘 알고 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을 통해 그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단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본질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신 분임을 인정하는 선언입니다. 헬라어로 ‘하나님의 아들’은 ‘호 휘오스 투 데우’(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로,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본질을 함께하시는 분으로 이해됩니다. 나다나엘은 또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이라 부릅니다. 이는 유대 백성이 고대하던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를 향한 고백입니다. 구약의 메시아 기대는 ‘왕’의 이미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에서는 “정사와 평강의 왕”이 나실 것을 예언했고, 스가...

요한복음 1:48 무화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부르시는 주님 요한복음 1장 48절은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 중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예수님의 신적 통찰과 부르심의 은혜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단순한 장소 묘사를 넘어 구약적 상징과 유대 전통 속에서 깊은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부르시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자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나다나엘은 빌립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예수님의 이 대답은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닙니다. 이는 나다나엘의 마음과 삶, 그리고 그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보신 주님의 통찰이며, 동시에 은밀한 자리에 계셨던 나다나엘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선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기 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는 그의 질문은 인간적인 놀라움이자, 동시에 주님의 전지성 앞에서 드러나는 경외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셨다고 말씀하시며,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알기 전부터 예수님은 그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헬라어는 ‘에이돈’(εἶδον)으로, 단순히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개념을 넘어,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는 영적 통찰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의 외형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과 동기, 마음속의 갈망까지도 아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리를 아시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깊은 고민과 기대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상징성 본문의 핵심은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라는 표현입니...

요한복음 1:43-51 묵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요한복음 1장 43절부터 5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과, 그 만남 속에 담긴 깊은 영적 진리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의 부르심,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적 통찰과 선언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복음의 초대이며, 믿음의 여정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참된 인식’의 순간을 드러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점점 더 깊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개별적인 만남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부르시는 예수님, 따르는 제자들 4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구절은 매우 짧지만,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예수님의 부르심, 곧 ‘나를 따르라’는 초대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아콜루데이’(ἀκολούθει)는 명령형으로, 단순히 예수님 뒤를 걷는 것을 넘어서, 삶 전체를 그분께 맡기고 따라오라는 절대적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빌립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이는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요일 4:10). 빌립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순종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자연스러운 확산을 보게 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결코 그 감격을 혼자 간직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나눔과 증언을 통해 확장되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자라갑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

요한복음 1:35-42 묵상,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다

  예수님을 따르는 첫 걸음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42절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첫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만남이나 호기심의 결과가 아니라,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며, 인간의 내면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출발선 위에서 시작되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어떻게 변화와 사명으로 이어지는지를 깊이 살펴보게 됩니다. 어린 양을 바라본 두 제자 35절에서 36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또 한 번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표현이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29절에서 한 번 선포한 동일한 말씀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선언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임을 말해줍니다. 이 선언을 들은 두 제자는 즉시 반응합니다. 요한복음 1장 37절은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복음의 능동성과 제자의 결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듣고’ 그리고 ‘따라갔다’는 두 개의 동사는 복음에 대한 바른 응답의 순서를 보여줍니다. 먼저 복음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그 듣는 말씀에 ‘반응’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삶의 시작입니다. ‘따라갔다’는 동사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는 단순한 뒤따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전적 헌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을 포함한 결단입니다. 이 단어는 이후 신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삶을 묘사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된 다음에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이해...

요한복음 1:29-34 묵상,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성령이 머무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장 29절부터 34절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 말씀으로, 복음서 전체에서 매우 핵심적인 단락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정체성,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한 몸처럼 작용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이 선언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복음의 출발점이자 중심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단순한 선지자나 도덕 교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즉 구약에서 예표된 희생제물로 분명히 선언합니다. '지고 간다'는 헬라어 동사 ‘아이로’(αἴρω)는 ‘들어 올리다, 제거하다’라는 뜻으로, 죄를 짊어지고 그 죄를 제거하는 희생제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특별히 ‘세상 죄’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특정 민족이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의 성취이며, 구약의 유월절 양과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사 53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 어린 양은 죄 없는 완전한 제물이며,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십니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순한 고난이나 비극으로 보지만,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이며,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협력 속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승리임을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무력한 죽음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대속적인 희생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진리를 외쳤고, 우리 역시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분의 피가 나를 정결케 하고...

요한복음 1장 30절 묵상, 나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

  나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 30절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고백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그분의 영원성과 우월성을 선포하는 신학적인 선언입니다.  짧지만 강력한 요한 고백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신학적 우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절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그리고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선재성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이 말씀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과 선재성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는 예수님이 요한보다 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약 6개월 후에 태어나셨고,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시간적 순서를 언급하며 동시에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프로토스'(πρώτος)는 단순히 시간상의 선후가 아니라, 본질적 우월성과 탁월함을 포함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보다 먼저 존재하셨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요한보다 뛰어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의 선재성(preexistence)을 나타내며,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곧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와 같은 고백은 단지 사변적인 신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선지자나 도덕 교사, 또는 탁월한 영적 인도자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성육신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앞에...

요한복음 1:29 묵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으며, 동시에 복음서 전체의 구속사의 핵심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외친 이 한마디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준비된 구속의 절정이며, 우리가 복음 안에서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더 깊이 묵상해 보시다. 세례 요한의 선언: 구약의 성취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친 장면은 단순한 감탄이나 상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구약에 흐르고 있는 희생제사 제도의 중심을 예수님께로 모으는 선언입니다.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제사 제도, 특별히 출애굽기 12장에서의 유월절 양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기 전날 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의 심판을 면했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사 53:7)는 메시아가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받을 존재임을 예언합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그 메시아가 지금 자기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고 간다"는 헬라어 동사 '아이로'(αἴρω)는 단순히 무거운 짐을 옮긴다는 의미를 넘어서, 죄를 속죄하기 위해 대신 짊어진다는 희생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지시는 죄가 단지 유대인의 죄가 아니라, "세상 죄"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복음이 유대 민족을 넘어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예수님의 사역이 전 세계를 향한 보편적인 구속 사역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아닌, 모든 민족,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

요한복음 1:24-28 묵상, 너희 가운데 서 계신 그분

  너희 가운데 서 계신 그분 요한복음 1장 24절부터 28절은 세례 요한의 증언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 구절은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예수님과, 이미 광야에서 사역하고 있는 세례 요한 사이의 결정적인 만남 직전에 해당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오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미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은혜의 신비, 겸손한 증인의 자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짧지만 강력한 요한의 선언에 귀 기울여 봅시다. 질문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동기 본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내진 자들은 바리새인들이라.”(24절) 여기서 우리는 앞서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이 보낸 사람들과 연결되는 흐름을 보게 됩니다. 처음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질문했고, 이제는 바리새인들의 이름이 명시됩니다. 이는 단지 인물 구성이 아니라, 요한복음 저자가 당시 유대 종교 권력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율법과 전통에 철저했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건과 정결에 대한 열심으로 백성들 앞에 존경받는 이들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식과 자기 의를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들이 요한에게 묻는 질문 역시 순수한 신앙의 동기라기보다, 그를 신학적으로 검증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25절) 이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메시아적 인물만이 새로운 의식을 행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즉, 세례는 선지자적 권위나 메시아적 사명과 연결된 행위였기 때문에, 요한이 이런 권위를 갖지 못했다면 세례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대중적 영향력을 불편하게 여기던 종교 권력은 그를 신학적으로 공격하며, 그 사역의 정당성을 의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요한복음 1장 19절-23절 묵상,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23절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증언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직전에 일어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명을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고백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사명을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정체성을 묻는 자들 19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니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이 장면은 단순한 인터뷰나 호기심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공식적인 조사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와 세례를 선포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유대 종교권력은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누구냐’는 이 질문은 단순한 이름이 아닌, 신학적 정체성과 메시아적 기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는 메시아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엘리야,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물음에 대해 분명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은 스스로를 부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 ‘아닌지’를 먼저 밝힙니다. 20절에 나오는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문에서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 즉 확실히 인정하고 시인한다는 뜻으로, 단순히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명확하게 부정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내가 아니다’를 분명히 선포함으로써 자신을 메시아적 기대에서 분리시킵니다. 요한의 진실함과 자기 부인의 영성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21절에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 구체적입니다.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 질문은 말라기 4장 5절의 예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보라 여...

요한복음 1장 18절 묵상,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요한복음 1장 18절은 요한복음 서문의 절정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과 계시자로서의 역할을 요약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인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 유일한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선포합니다. 오랜 구약의 기대와 그림자 속에서 마침내 드러난 실체,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여기서 ‘보다’는 헬라어로 ‘헤오라켄’(ἑώρακεν)이며, 완료 시제로 기록되어 과거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지 육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영광을 직접 보고 이해하고 파악하는 일을 말합니다. 곧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감히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이 고백은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 모세조차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함과 초월성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죄인 된 인간은 그분의 본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 불가능함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이자, 구원의 본질임을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여기서 요한은 놀라운 진리를 선언합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문장은 요한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표현을 짚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 묵상, 율법과 은혜

  율법은 모세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요한복음 1장 17절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 그림자와 실체를 나누는 전환점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한 절 안에 담긴 대비와 선언은 단지 문학적인 장치가 아니라, 구속사의 중심을 찌르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율법이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은혜와 진리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본문으로 드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았고 본문은 먼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 선언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히브리어로는 토라(Torah), 헬라어로는 노모스(νόμος)로 번역되며, 단순한 규율이나 법령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말씀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는 이 율법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한 중보자였습니다. 모세는 구약시대의 대표적 인물로, 율법을 수여받은 자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율법 자체처럼 철저하고 정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달한 율법은 궁극적 구원을 이루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롬 3:20),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고,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의의 기준을 보여주는 기능을 했습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인간의 죄성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기능을 하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통로였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합니다. 율법은 은혜가 아니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정적인 은혜요, 예표적인 계시였습니다. 곧 오실 그리스도를 향해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했습니다(갈 3:24). 이처럼 율법은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지만, 완전한 구원을 ...

요한복음 1장 16절 묵상, 은혜 위에 은혜

  충만함에서 받았노니 요한복음 1장 16절은 성경 전체 복음 메시지의 정수를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은혜를 받는다는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의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은혜의 흐름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받은 자들이며, 그분 안에서 매 순간 새롭고 충만한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요 1:16)라는 말씀은 문법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깊이 있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만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로마'(πλήρωμα)인데, 이는 단순히 가득 찼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특히 신격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골 1:19, 2:9 참조). 이 ‘충만함’은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의한 충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충만입니다. 곧, 이 충만함은 피조물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충만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인 생명과 은혜, 진리, 사랑, 거룩함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거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충만함에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험입니다. 원문에서는 이 '받다'라는 동사가 부정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영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곧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이미 받았고, 계속해서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이자 본질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된 구절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카린 안티 카리토스’(χάριν ἀντὶ χάριτος)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1장 15절 묵상, 나보다 앞선 이

  그보다 먼저 계신 이 요한복음 1장 15절은 단 한 구절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先在)에 대한 깊고 무거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짧은 외침 속에 세례 요한의 고백은 복음의 핵심을 꿰뚫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에 대한 증언으로서, 우리 신앙의 기초를 굳건히 세워 주눈 역할을 합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 예수를 증언하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5). 이 구절은 요한복음 저자가 서문(1:1~18) 가운데, 세례 요한의 증언을 삽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나타났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를 철저히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의 외침은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선언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는 말은 단지 시간적인 순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그분이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뜻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세례 요한 자신이 받은 계시와 인격적인 만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분의 날을 사모했지만, 세례 요한은 바로 그 메시야를 직접 보고, 듣고, 만지며 증언하는 마지막 선지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혈연적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보다 앞선"—신성과 선재의 선언 세례 요한의 고백 중 "나보다 앞선 것"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예수가 위대한 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헬라어 "프로토스"(πρῶτός)는 우위, 선행, 탁월함을 의...

요한복음 1장 14절 묵상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선언 중 하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구절은 성육신의 교리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계시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본문을 원어적으로 분석하고, 성경신학적 의미를 깊이 있게 해석하며, 우리 신앙생활과 연결하여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첫 번째 부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말씀"은 앞서 1장 1절에서 언급된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Καὶ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카이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로 되어 있습니다. "ἐγένετο"(에게네토)라는 동사는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는 영원한 하나님이 시간이 시작된 이후에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말씀이 육신을 입는 것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신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더하셨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육신"(헬라어: "σὰρξ", 사르크스)은 단순한 인간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요한복음 1장 13절 묵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이나 혈통적 계승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본문을 원어적으로 분석하고, 성경신학적 의미를 깊이 있게 해석하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구원 요한복음 1장 13절의 첫 번째 부분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인간적인 방법이나 의지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οὐκ ἐξ αἱμάτων, οὐδὲ ἐκ θελήματος σαρκός, οὐδὲ ἐκ θελήματος ἀνδρός"(우크 엑스 하이마톤, 우데 엑 텔레마토스 사르코스, 우데 엑 텔레마토스 안드로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첫째, "혈통으로"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혈연적 계승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혈통이나 민족적 배경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도 로마서 9장 6-8절에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강조합니다. 즉, 육적인 계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 선택된 자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둘째, "육정으로"라는 표현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나 본성적인 의지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묵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한복음 1장 12절은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를 선포합니다. 인간은 본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됩니다. 본문을 원어적으로 분석하고, 성경신학적 의미를 깊이 있게 해석하며,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영접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ἔλαβον"(엘라본)입니다. 이는 단순히 손님을 맞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소유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동의나 호의적인 태도를 넘어, 전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와 사역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름"(헬라어: "τὸ ὄνομα", 토 오노마)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 자"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접과 믿음은 단순한 인간의 선택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죄로 인해 하나님을 거부하는 존재입니다(롬 3:10-12).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참되게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감정적인 반...

요한복음 1장 9-11절 묵상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 9-11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그분의 백성마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과 사역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불신앙을 드러냅니다. 본문을 원어적으로 분석하고,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해석하며, 그 의미를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 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참 빛"(헬라어: "τὸ φῶς τὸ ἀληθινόν",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은 단순히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단순한 교사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궁극적인 계시이시며,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비추시는 분입니다. 구약에서 "빛"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를 상징합니다(시 27:1, 사 60:1). 그러나 요한복음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빛이심을 선언합니다. "참 빛"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다른 빛들보다 우월한 빛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만이 유일한 참된 빛이심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음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참 빛"이 "각 사람에게 비춘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보편적인 사역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든 사람이 자동적...

요한복음 1장 6-8절 묵상 증인, 세례 요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증인, 세례 요한 요한복음 1장 6-8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보내신 세례 요한의 사명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6-8).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세례 요한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요한 요한복음 1장 6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뜻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속에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Ἐγένετο ἄνθρωπος"(에게네토 안트로포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이지만, 단순히 인간이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그가 등장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자들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 역시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중요한 시점에 보내신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탄생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그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며,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빛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