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8 무화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부르시는 주님
요한복음 1장 48절은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 중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예수님의 신적 통찰과 부르심의 은혜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단순한 장소 묘사를 넘어 구약적 상징과 유대 전통 속에서 깊은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부르시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자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나다나엘은 빌립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예수님의 이 대답은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닙니다. 이는 나다나엘의 마음과 삶, 그리고 그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보신 주님의 통찰이며, 동시에 은밀한 자리에 계셨던 나다나엘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선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기 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는 그의 질문은 인간적인 놀라움이자, 동시에 주님의 전지성 앞에서 드러나는 경외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셨다고 말씀하시며,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알기 전부터 예수님은 그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헬라어는 ‘에이돈’(εἶδον)으로, 단순히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개념을 넘어,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는 영적 통찰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의 외형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과 동기, 마음속의 갈망까지도 아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리를 아시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깊은 고민과 기대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상징성
본문의 핵심은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유대 전통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장면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무화과나무는 ‘평화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상 4장 25절은 “유다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번영 속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화과나무 아래는 라삐들이 율법을 묵상하던 장소로도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집 근처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그 아래 그늘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율법을 깊이 묵상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말은,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는 영적 시간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그 나무 아래에서 아마도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 성취될지를 묵상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를 아셨고, 그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고요한 시간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주님 앞에서 조용히 머물며, 아무 말 없이 말씀을 펼쳐놓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세상의 소음에 묻히는 것 같지만,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무화과나무 아래’를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그곳에서 흘리는 눈물, 그곳에서 드리는 고백, 그곳에서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다 들으시고 기억하십니다.
주님의 시선 앞에 있는 삶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던 나다나엘을 보고 계셨을 뿐 아니라, 그를 부르셨습니다. ‘보다’에서 ‘부르심’으로 이어지는 복음의 흐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뿐만 아니라, 그 시선 안에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의 시선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시선이 아니라, 불러 일으키기 위한 시선입니다.
나다나엘은 그 말씀 한마디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단 한 번의 대면,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그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신앙은 체험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적 깨달음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예수님의 깊은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선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주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을 보시고, 그 내면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 안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항상 은혜의 시선입니다. 나다나엘은 그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뿐입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 앞에서 선한 행위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그 자리를 보셨고, 그 자리를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 은혜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주님은 이미 우리를 보고 계셨고, 부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바쁜 일상 가운데 잠시 무릎 꿇는 그 순간을 보시고,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눈물을 보시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참으며 기도하는 그 고요한 마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를 보고 있다. 너를 안다. 나를 따르라.’
결론
요한복음 1장 48절은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그 속에는 예수님의 깊은 통찰과 은혜의 부르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매우 평범한 자리에서 주님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는지, 기도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자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기억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고 하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께는 그 자리가 특별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글을 쓰다가 오타를 낼 수도 있지만, 주님의 시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확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우리가 머문 그 ‘무화과나무 아래’를 축복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조용히 주님의 시선을 느끼며 그분 앞에 나아갑시다. 주님의 눈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님의 눈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분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