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4-28 묵상, 너희 가운데 서 계신 그분
너희 가운데 서 계신 그분
요한복음 1장 24절부터 28절은 세례 요한의 증언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 구절은 아직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예수님과, 이미 광야에서 사역하고 있는 세례 요한 사이의 결정적인 만남 직전에 해당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오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미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은혜의 신비, 겸손한 증인의 자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짧지만 강력한 요한의 선언에 귀 기울여 봅시다.
질문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동기
본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내진 자들은 바리새인들이라.”(24절) 여기서 우리는 앞서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이 보낸 사람들과 연결되는 흐름을 보게 됩니다. 처음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질문했고, 이제는 바리새인들의 이름이 명시됩니다. 이는 단지 인물 구성이 아니라, 요한복음 저자가 당시 유대 종교 권력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율법과 전통에 철저했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건과 정결에 대한 열심으로 백성들 앞에 존경받는 이들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식과 자기 의를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들이 요한에게 묻는 질문 역시 순수한 신앙의 동기라기보다, 그를 신학적으로 검증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25절)
이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메시아적 인물만이 새로운 의식을 행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즉, 세례는 선지자적 권위나 메시아적 사명과 연결된 행위였기 때문에, 요한이 이런 권위를 갖지 못했다면 세례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대중적 영향력을 불편하게 여기던 종교 권력은 그를 신학적으로 공격하며, 그 사역의 정당성을 의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유의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러한 바리새인의 반응을 통해, 진리 앞에서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전통에 익숙했던 그들은, 눈앞에 다가온 은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치는 광야의 소리는 그들에게 도전이었고, 불편한 진실이었으며, 신학적 교만을 흔드는 외침이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26절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과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 계시나니…”
‘나는 물로 세례를 베푼다’는 이 선언은 요한의 사역이 회개와 준비의 성격을 가진 것임을 다시 확인하는 말입니다. 물 세례는 죄 사함 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한 회개와 정결의 상징으로 주어진 외적 표시였습니다. 이는 곧 오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전초적 사역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말에서 진정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 계시나니…” 이 말씀은 놀라운 진술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현재 완료 시제의 ‘서 있다’(ἕστηκεν)가 사용되어, 이미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서 계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아직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으셨지만,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셨습니다. 단지 그들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삶의 현장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분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 계신 주님, 말씀 가운데 계신 주님, 우리의 고통과 기쁨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 그분은 결코 먼 하늘 위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신 분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 외침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을 깨뜨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정치적 구원자, 군사적 해방자, 율법의 수호자.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조용히, 겸손하게, 그들 한복판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언제나 인간의 기대를 넘어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한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의 신발끈도 풀기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한계를 넘어서, 곧 나타나실 분의 위엄을 선포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 이가 계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7절)
고대 유대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특정한 봉사의 범위가 존재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섬기되, 그의 신발끈을 풀어주는 일은 종이 아닌 이상 하지 않는 가장 낮은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을, 예수님 앞에서조차 할 수 없는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엄 앞에 선 인간의 참된 위치를 드러내는 진실한 자기 인식입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등장했지만, 자신이 그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서 철저히 무릎 꿇은 자였습니다. 이것이 참된 종의 자세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이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주님 앞에서의 겸손은 단지 자세나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자신을 과장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깊이 이해한 자는 자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신발끈을 푸는 일조차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자만이, 오히려 복음을 가장 높이 드러내는 자가 됩니다.
결론: 그분은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28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이 짧은 지리적 표기는 그저 역사적 정보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실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인간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십니다. 요단강 건너편, 광야 한복판, 이름 없는 동네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가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겸손한 회개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계셨고, 요한은 그를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요?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요? 그분이 우리 한복판에 서 계신다는 이 경이로운 사실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요?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기대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그분을 증언하는 일에만 충실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말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는 자리. 주님은 이미 우리 가운데 서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