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고린도전서인 게시물 표시

고린도전서 16장 강해

  고린도전서 16장 강해 신앙은 마지막 인사에서도 드러납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은 편지의 마지막 장입니다. 앞선 장들에 비하면 교리적 논쟁이나 강한 책망이 덜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결코 단순한 마무리 인사가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연보, 사역 계획, 동역자 대우, 영적 깨어 있음, 사랑의 원리, 문안과 저주와 축복을 함께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전체를 보면 바울은 교회의 분열, 음행, 소송, 결혼 문제, 우상 제물, 성찬의 무질서, 은사 문제, 부활 신앙의 혼란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그는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바른 교리는 반드시 바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헌금과 동역과 교회 질서와 형제 사랑에서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예배당 안에서만 고백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사용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역자를 존중하는 마음, 형제를 사랑하는 실제적 행위 속에서도 복음은 드러납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 바울은 먼저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해 말합니다(고전 16:1). 여기서 말하는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바울은 이방 교회들에게 그들을 돕도록 권면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한 몸임을 보여 주는 표지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고전 16:1). 곧 연보는 즉흥적 감정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 있는 순종입니다. 성도는 감동될 때만 돕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책임 있게 돕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고전 16:2).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첫째, 연보는 정기적입니다. “매주 첫날”이라는 표현은 초대교회...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복음의 중심은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신약성경에서 부활을 가장 깊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장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심각한 문제, 곧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다룹니다(고전 15:12). 고린도 교회는 은사와 지식과 말에는 풍성했지만, 복음의 중심인 부활 신앙에서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전 15:1). 여기서 바울은 새로운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전했고, 그들이 받았고, 그 안에 서 있는 복음을 다시 붙들게 합니다. 신앙은 새로운 자극을 계속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음의 중심으로 거듭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고전 15:2). 다만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이는 참된 믿음은 복음을 붙드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순간적 감정이나 종교적 분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 복음 위에 서는 것이 구원 신앙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여기에는 복음의 네 기둥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둘째, 그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하여”였습니다. 셋째, 그는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넷째,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순교가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셨고, 죄인을 버리지도 않...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사랑 안에서 은사를 사용하라 고린도전서 14장은 12장과 13장의 결론처럼 읽어야 합니다. 12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다양하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13장에서는 그 모든 은사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14장에서 바울은 그 사랑의 원리가 실제 예배와 은사 사용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방언은 신비롭고 강렬한 은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의 가치 기준을 “화려함”이 아니라 “덕을 세움”에 둡니다. 교회를 세우는가,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가, 하나님께 질서 있게 드려지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좋지만, 사랑 없이 은사를 추구하면 은사는 자기 과시가 됩니다. 사랑은 은사의 방향이고, 덕을 세움은 은사의 목적입니다. 방언과 예언의 차이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방언은 하나님께 향한 영적 언어입니다. 그 자체를 바울이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합니다(고전 14:5). 그러나 문제는 공예배 안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교회 전체를 세우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반면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입니다(고전 14:3). 여기서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맞히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감동 안에서 공동체에 전하여 성도를 세우고, 바른 길로 권면하고, 낙심한 자를 위로하는 말씀 사역적 성격을 가집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고린도전서 12장 강해

고린도전서 12장 강해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몸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본질을 다루는 장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들이 말과 지식에 풍족하고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7). 그러나 은사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았지만 분열도 많았고, 지식은 있었지만 사랑이 부족했으며, 예배는 활발했지만 질서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이런 교회를 향한 바울의 중요한 교정입니다. 바울은 은사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고전 12:4-11). 그러나 바울은 은사의 목적과 방향을 바로잡습니다. 은사는 개인의 영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자기 자랑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선물입니다(고전 12:7). 고린도전서 12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신앙의 근본을 말합니다(고전 12:1-3). 둘째, 은사는 다양하지만 성령과 주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모든 은사는 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가르칩니다(고전 12:4-11). 셋째, 교회는 한 몸이며 성도들은 그 몸의 여러 지체라는 비유를 통해,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설명합니다(고전 12:12-31). 이 장의 핵심은 “다양성 안의 하나 됨”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 다양한 직분, 다양한 사역, 다양한 성격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은 한 성령, 한 주, 한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고전 12:4-6). 그러므로 다양성은 분열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야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지만 한 몸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또한 이 장은 교회 ...

고린도전서 11장 강해

고린도전서 11장 강해 예배의 질서와 성찬의 거룩 고린도전서 1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예배 가운데 남자와 여자, 머리와 권위, 창조 질서와 공동체의 덕을 다루는 부분입니다(고전 11:2-16). 둘째는 고린도 교회가 성찬을 왜곡한 문제를 책망하고, 주의 만찬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부분입니다(고전 11:17-34). 두 주제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깊은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질서 있고 거룩하게 예배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많다고 해서 예배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열, 자랑, 무질서, 계층 간 차별, 성찬의 왜곡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11장에서 예배의 외적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안에 드러나는 신학적 질서와 사랑의 태도, 공동체의 거룩을 다룹니다. 11장 1절은 사실 앞 단락의 결론이면서 11장의 문을 여는 말씀처럼 읽힙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고전 11:1).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고,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0:31-33). 그러므로 11장에서도 예배의 질서와 성찬의 문제는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과 연결됩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사람의 자기표현만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구속의 은혜, 그리스도의 주권과 교회의 하나 됨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유를 말했지만, 그 자유가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은사를 말했지만,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성찬을 행했지만, 그 성찬이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리로 변질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너무 쉽게 개인 취향의 문제로 만...

고린도전서 10장 강해

고린도전서 10장 강해 광야 역사를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10장은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통해 신약 교회에게 경고와 교훈을 주는 장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과 9장에서 바울은 우상 제물 문제, 성도의 자유, 형제를 위한 절제, 복음을 위한 권리 포기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10장에서는 그 문제를 더 깊은 성경적 역사 속에 놓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들의 지식과 자유를 자랑하면서도 우상숭배의 위험을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불러와 말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특권을 누렸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합니다(고전 10: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려는 사도적 표현입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단순한 역사 지식이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 원리입니다. 그는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라고 말합니다(고전 10:1). 여기서 “우리 조상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지만,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도 포함된 교회에게 그 역사를 “우리”의 역사처럼 말합니다. 신약 교회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영적 교훈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의 표지였습니다. 홍해 통과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표현합니다(고전 10:2). 이스라엘은 모세와 연합된 백성으로서 구름과 바다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신약의 세례와 완전히 동일한 예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typology, 곧 모형론적으로 해석합니다. 홍해를...

고린도전서 9장 강해

  고린도전서 9장 강해 복음 사역자의 권리와 자유 고린도전서 9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 사역자의 권리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권리를 복음을 위해 어떻게 내려놓았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우상 제물 문제를 다루며, 성도의 자유가 사랑 안에서 절제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고전 8:13). 이제 9장에서 바울은 그 원리를 자기 삶에 적용합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었지만,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 말합니다(고전 9:1). 이 질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거나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바울이 사례를 받지 않고 일한 것을 두고, 참된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고전 9:1).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 길 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바울 사도직의 결정적 근거였습니다. 그는 사람에게서 임명받은 종교 교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부름받은 사도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 자체가 그의 사도직의 열매였습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는 말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고전 9:1).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말합니다(고전 9:2).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적 사역의 살아 있는 증거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 교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