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 강해

고린도전서 12장 강해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몸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본질을 다루는 장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들이 말과 지식에 풍족하고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7). 그러나 은사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았지만 분열도 많았고, 지식은 있었지만 사랑이 부족했으며, 예배는 활발했지만 질서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이런 교회를 향한 바울의 중요한 교정입니다. 바울은 은사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고전 12:4-11). 그러나 바울은 은사의 목적과 방향을 바로잡습니다. 은사는 개인의 영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자기 자랑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선물입니다(고전 12:7).

고린도전서 12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신앙의 근본을 말합니다(고전 12:1-3). 둘째, 은사는 다양하지만 성령과 주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모든 은사는 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가르칩니다(고전 12:4-11). 셋째, 교회는 한 몸이며 성도들은 그 몸의 여러 지체라는 비유를 통해,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설명합니다(고전 12:12-31).

이 장의 핵심은 “다양성 안의 하나 됨”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 다양한 직분, 다양한 사역, 다양한 성격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은 한 성령, 한 주, 한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고전 12:4-6). 그러므로 다양성은 분열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야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지만 한 몸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또한 이 장은 교회 안의 비교와 열등감, 우월감을 동시에 다룹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눈에 띄는 은사를 가졌다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은사가 작고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열등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 태도 모두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몸에는 눈도 필요하고 손도 필요하며, 머리도 필요하고 발도 필요합니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요긴하고, 덜 귀히 여기는 지체에게 더 귀한 것을 입히신다고 말합니다(고전 12:22-24).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론이면서 동시에 교회론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에게 주어지지만, 개인을 위해 끝나지 않습니다. 은사는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집니다. 교회는 은사를 소비하는 무대가 아니라, 각 지체가 사랑과 질서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장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은사는 자랑이 되고, 예배는 혼란이 되며, 교회는 경쟁의 장이 됩니다. 그러나 이 장을 바르게 이해하면 은사는 감사가 되고, 다양성은 축복이 되며, 교회는 한 몸으로 세워집니다.

신령한 것에 대한 바른 분별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1). 여기서 “신령한 것”은 성령의 은사, 영적 현상,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영적 활동 전반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회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능력 같은 은사들이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현상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말합니다(고전 12:2). 고린도 성도들 중 상당수는 과거에 우상숭배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신전 문화, 신비적 체험, 황홀경, 종교적 열광에 익숙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어떤 강렬한 영적 현상이나 황홀한 체험을 성령의 역사로 오해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영적 현상을 분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영적인 것을 무조건 긍정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현상이라고 해서 모두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말합니다(요일 4:1).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바울은 성령의 역사와 거짓 영적 현상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3). 이것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첫 번째 분별 기준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낮추거나 부정하거나 주변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예수를 주시라”는 고백은 단순히 입술로 하는 종교적 문구가 아닙니다. “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주”라는 호칭은 황제와 권력의 언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를 주로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나의 삶과 예배와 은사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참된 역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아무리 강렬한 체험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흐리게 하면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놀라운 능력처럼 보여도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를 부정하면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은사를 자랑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은 성령의 목적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예수님을 주로 높이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자신을 주인처럼 높인다면 그것은 성령의 방향과 맞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아래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영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집회, 어떤 사역, 어떤 은사, 어떤 체험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 분별하려면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가? 예수의 주 되심이 높아지는가? 십자가의 복음이 분명해지는가? 사람의 이름이 높아지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가? 성령의 참된 역사는 언제나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으로 교회를 이끕니다(고전 12:3).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바울은 이제 은사의 다양성과 근원의 하나 됨을 설명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라고 말합니다(고전 12:4).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고, 그 은사가 나타나는 방식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고, 어떤 사람은 섬김의 은사를 받으며, 어떤 사람은 지혜와 지식의 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믿음과 병 고침과 능력의 은사를 받습니다. 다양성은 성령의 역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양성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은 같다”고 말합니다(고전 12:4).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차이는 분열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누가 더 영적이고 누가 덜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각각 다르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이어 바울은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라고 말합니다(고전 12:5). 여기서 “직분”은 섬김의 형태, 사역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직분과 섬김이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돕는 일, 다스리는 일 등 다양한 사역이 있습니다(고전 12:28). 그러나 그 모든 섬김의 주인은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직분은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또한 바울은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합니다(고전 12:6). 여기서 “사역”은 역사, 활동, 능력의 나타남을 뜻합니다. 어떤 사역은 크게 보이고, 어떤 사역은 작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은 드러나고, 어떤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절들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고, 직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며, 사역의 역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십니다(고전 12:4-6). 교회의 은사와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성도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자기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교회의 다양성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획일적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사를 주지 않으십니다. 다양한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통해 하나의 몸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양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다양성 자체가 아니라, 다양성이 사랑과 질서 없이 사용될 때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은사의 차이 때문에 비교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눈에 띄는 은사를 부러워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은사를 과시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습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는 같습니다. 사역은 여러 가지지만 하나님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차이는 교만이나 열등감의 근거가 아니라 감사와 섬김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은사의 목적을 분명히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고전 12:7).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2장의 핵심 원리 중 하나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타내시는 목적은 개인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입니다. 은사는 받은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목적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은사를 더 높게 여기고, 어떤 은사를 더 영적인 것으로 보며, 은사를 경쟁과 자랑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특히 방언과 같은 눈에 띄는 은사를 과도하게 높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의 참된 가치를 묻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은사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가? 형제를 세우는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가?

“각 사람에게”라는 말도 중요합니다(고전 12:7). 성령의 은사는 특정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께 받은 은사와 역할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쓸모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크게 드러나는 은사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섬기는 은사를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는 사실은 모든 성도의 존귀함과 책임을 보여 줍니다.

“성령을 나타내심”이라는 표현은 은사가 단순한 인간 재능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성격, 재능, 경험, 학습된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그 모든 것을 넘어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은사를 통해 성령의 일하심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말고 성령의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유익이라는 기준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어떤 은사가 아무리 강렬하게 보이더라도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형제를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바르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은사는 작고 조용해 보여도 성도를 위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공동체를 견고하게 한다면 매우 귀한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효과의 화려함보다 교회의 유익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의 사역에도 적용됩니다. 설교, 찬양, 봉사, 상담, 행정, 재정, 교육, 전도, 선교, 중보기도, 식사 준비, 청소, 돌봄, 문서 사역, 미디어 사역 등 모든 섬김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기준 아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통해 인정받는가보다, 이 일이 교회를 세우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중심에 서는가보다, 그리스도의 몸이 유익을 얻는가가 중요합니다.

은사는 선물이지만 동시에 책임입니다. 받은 사람은 그것을 묻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교회를 손해 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사용할 때는 반드시 사랑과 겸손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나를 위한 장식이 아니라 몸을 위한 도구입니다. 성령은 각 사람에게 나타나시되, 그 목적은 함께 유익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

다양한 은사와 한 성령

바울은 다양한 은사의 예를 나열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고전 12:8).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실제 상황에 맞게 분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의 내용을 깊이 깨닫고 전달하는 은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지혜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십니다(고전 12:9). 여기서 믿음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구원 신앙이라기보다,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담대히 신뢰하고 공동체를 믿음으로 세우는 은사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격려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믿음의 은사는 공동체를 흔들리지 않게 붙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주십니다(고전 12:9-10). 하나님은 때로 병 고침과 능력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긍휼과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이런 은사는 받은 사람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 고침과 능력의 은사는 반드시 겸손과 복음의 질서 안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십니다(고전 12:10).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 안에서 교회에 전하여 권면하고 위로하고 세우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 발언이 참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들 분별함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영적 열광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분별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십니다(고전 12:10).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서 특별히 논쟁이 되었던 은사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4장에서 더 분명히 말하듯, 방언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통역 없는 방언은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방언도 질서와 사랑 아래 있어야 합니다.

이 은사 목록은 완전한 목록이라기보다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베드로전서 4장 등에도 다양한 은사와 사역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성도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몇 가지 특정한 현상으로만 좁히면 안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나누는 은사, 권면하는 은사 모두 귀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은사를 말한 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고전 12:11). 은사의 주권은 성령께 있습니다. 사람은 은사를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원하는 대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만할 수 없고, 받지 못한 은사를 억지로 흉내 낼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은사에 대한 평안을 줍니다. 나는 왜 저 사람과 같은 은사가 없을까 하며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받은 은사가 작다고 생각해도 멸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도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보다, 받은 은사를 성령의 뜻대로 사랑 안에서 사용하는가입니다.

한 몸과 많은 지체

바울은 이제 교회를 몸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12). 이 비유는 고린도전서 12장의 중심 이미지입니다. 교회는 조직이나 모임을 넘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지체가 많다고 해서 몸이 여러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지체가 한 몸을 이룹니다.

이 비유는 교회의 다양성과 하나 됨을 동시에 설명합니다. 몸에 눈, 손, 발, 귀, 코가 있듯이 교회 안에는 다양한 성도와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다양성은 분열의 이유가 아니라 몸의 건강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고전 12:13). 이것은 교회 일치의 근거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민족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종과 자유인은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차이를 넘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인간적 친밀감이나 취향의 일치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한 몸 되게 하신 데 근거합니다. 우리는 서로 성격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사회적 위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신 자들입니다(고전 12:13).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를 단순한 동호회 회원처럼 대하지 않고, 같은 몸의 지체로 대해야 합니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표현은 성령의 생명 공급을 나타냅니다(고전 12:13). 성도는 같은 성령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몸의 지체들이 같은 피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교회는 성령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외적 조직의 결속보다 더 깊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생명적 연합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깊이 책망합니다. 그들은 바울, 아볼로, 게바를 중심으로 나뉘었고, 은사로 비교했으며, 성찬의 자리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한 몸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분열은 교회의 본질과 맞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세대 차이, 경제적 차이, 학력 차이, 지역 차이, 성격 차이, 신앙 연륜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몸을 찢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다양한 지체들이 한 성령 안에서 세워지는 몸입니다.

열등감에 빠진 지체에게

바울은 몸의 비유를 통해 먼저 열등감에 빠진 지체를 다룹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14). 몸은 한 부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고 말해도, 그것 때문에 몸에 붙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고전 12:15). 또한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고 말해도, 그것 때문에 몸에 붙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고전 12:16).

여기서 발과 귀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지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손은 활동적이고 눈은 중요한 인식 기관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발이나 귀는 자신을 덜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지체에게 말합니다. 네가 손이 아니라고 해서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네가 눈이 아니라고 해서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너는 분명히 몸에 속한 지체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열등감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설교자나 찬양 인도자, 교사, 리더처럼 눈에 띄는 역할을 보며 자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말도 잘 못하고, 사람들 앞에 서지도 못하고, 특별한 은사도 없는 것 같으니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생각을 거부합니다. 몸에는 보이지 않는 지체도 필요합니다. 조용한 섬김도 몸에 속한 귀한 역할입니다.

바울은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 묻습니다(고전 12:17). 만일 모두가 눈이라면 몸은 기괴하고 기능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은사와 역할을 가지면 교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건강은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각 지체가 자기 역할을 감당하는 데 있습니다.

이 말씀은 획일화를 경계합니다. 어떤 교회는 특정 은사나 특정 사역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기도해야 하고, 같은 방식으로 말해야 하고, 같은 은사를 경험해야 한다고 압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몸의 다양성을 말합니다. 모두가 눈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손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체를 다르게 두셨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18). 지체의 위치와 역할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두셨습니다. 이것은 큰 위로입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내가 선 자리, 내가 감당하는 역할이 사람 눈에 작아 보여도 하나님께서 몸 안에 두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해서 몸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비교는 은사를 죽입니다. 열등감은 섬김을 막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발은 손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귀는 눈이 되려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발은 발로서, 귀는 귀로서 몸을 섬기면 됩니다.

우월감에 빠진 지체에게

바울은 이제 반대로 우월감에 빠진 지체를 책망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고전 12:21). 앞에서는 열등감을 가진 지체가 “나는 몸에 붙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체가 다른 지체에게 “너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것도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눈처럼 앞을 보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처럼 지도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도 있습니다. 손처럼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발처럼 묵묵히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손을 필요 없다고 하고, 머리가 발을 필요 없다고 한다면 몸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눈이 중요해도 손이 없으면 볼 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중요해도 발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은사와 직분의 교만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더 중요한 사역을 한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낮게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행정과 봉사를 가볍게 여기고, 찬양 사역자는 청소와 식사 봉사를 작게 여기며, 지도자는 조용히 기도하는 성도를 눈에 띄지 않는다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쓸 데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고전 12:21).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말 중 하나가 “저 사람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필요 없는 지체는 없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어떤 역할은 조정되어야 하고, 어떤 사역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존재 자체를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은 몸의 원리를 거스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두신 지체를 사람이 멸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고 말합니다(고전 12:22). 몸에서 약해 보이는 지체가 사실은 생명 유지에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장기들이 없으면 몸은 살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도들의 기도, 헌신, 돌봄, 인내, 보이지 않는 봉사가 교회를 살립니다.

또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 합니다(고전 12:23). 몸은 약하고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을 더 조심히 보호합니다. 하나님도 교회 안에서 약하고 덜 귀해 보이는 지체를 더 귀하게 돌보십니다. 교회는 세상처럼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만 높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약한 지체를 더 귀히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이 원리는 고린도 교회의 가치관을 뒤집습니다. 고린도 사회는 지혜, 웅변, 지위, 부, 명예를 높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 영향을 받아 눈에 띄는 은사와 힘 있는 사람을 높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몸의 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해 보이는 지체를 요긴하게 하십니다. 덜 귀히 여김을 받는 지체에게 더 귀한 것을 입히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말씀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성공 기준을 따라 사람을 평가하면 몸이 병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지체를 귀히 여기십니다. 작은 교사, 묵묵한 봉사자, 병상에서 기도하는 성도, 가난하지만 믿음으로 버티는 성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교회를 지키는 성도들이 몸에 요긴한 지체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심

바울은 하나님께서 몸을 어떻게 세우셨는지를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라고 합니다(고전 12:24). 몸의 질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몸을 고르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고르게 하다”는 말은 서로 조화롭게 결합하고 균형 있게 구성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의존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특히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셨다”고 합니다(고전 12:24). 세상은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밀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십니다. 이것은 교회의 윤리를 결정합니다. 교회는 부족한 자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약한 자를 배제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몸의 질서를 거스릅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말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고전 12:25). 하나님께서 몸을 이렇게 조화롭게 하신 이유는 분쟁이 없게 하고 서로 돌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의 다양성은 서로 싸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돌보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나뉘었고, 성찬의 자리에서도 분열이 있었으며, 은사 문제에서도 우열 의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몸의 비유로 그들의 분쟁을 치유하려 합니다. 몸은 지체끼리 싸우면 병듭니다. 손이 발을 공격하고, 눈이 귀를 멸시하고, 머리가 몸의 다른 부분을 무시하면 몸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지체는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서로 같이 돌본다”는 말은 교회의 사랑이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상호적 책임임을 보여 줍니다(고전 12:25).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보고, 약한 자도 자신의 방식으로 몸을 유익하게 합니다.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고, 가난한 자도 믿음과 기도로 교회를 세웁니다.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를 세우고, 배우는 자도 겸손과 순종으로 교회를 세웁니다. 몸 안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필요합니다.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26). 이것이 몸의 생명적 연합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온몸이 아픕니다. 작은 발가락 하나가 다쳐도 몸 전체가 불편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한 성도가 고통받으면 교회 전체가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반대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고전 12:26).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이 칭찬받고 쓰임받을 때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경쟁자가 아니라 같은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광은 몸 전체의 기쁨입니다. 시기는 몸의 원리를 모를 때 생깁니다. 몸의 원리를 알면 형제의 영광을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공감 능력을 요구합니다. 성도는 서로의 고통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성도가 슬픔을 겪을 때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은혜를 받고 쓰임받을 때 “왜 저 사람만?” 하며 시기할 수 없습니다. 몸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

바울은 몸의 비유를 결론적으로 적용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27). 이 말씀은 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 이상의 깊은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은 교회의 존귀함을 보여 줍니다(고전 12:27). 교회는 인간 조직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성도들이 모여 있어도,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성도를 함부로 멸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말은 각 성도의 책임을 보여 줍니다(고전 12:27). 성도는 몸에 속한 지체로서 자기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몸의 지체가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면 몸 전체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눈이 보지 않고, 손이 움직이지 않고, 발이 걷지 않으면 몸이 불편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자신의 은사와 역할을 사용하지 않으면 교회는 손해를 봅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 여러 직분을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12:28).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다양한 사역과 은사를 세우셨음을 다시 말합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는 말씀의 기초와 가르침에 관련된 직분입니다.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능력과 병 고침의 은사는 하나님의 권능과 긍휼을 나타냅니다.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실제적 돌봄과 질서를 세웁니다. 각종 방언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다양한 은사를 모두 언급하면서도, 모든 은사가 교회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특히 “서로 돕는 것”이라는 은사가 언급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고전 12:28). 고린도 교회는 화려한 은사를 높였지만, 바울은 돕는 일을 은사의 목록에 포함합니다. 남을 돕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돕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 때문에 살아납니다. 병든 자를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섬기고, 보이지 않는 필요를 채우는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에 매우 귀합니다.

“다스리는 것”도 은사입니다(고전 12:28). 교회에는 질서와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다스림은 세상적 지배가 아닙니다. 몸을 세우기 위한 섬김의 지도력입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의 여러 지체가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섬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목록을 통해 은사의 우열 경쟁을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세우셨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말씀 사역도 필요하고, 섬김도 필요하고, 행정도 필요하고, 긍휼도 필요하고, 기도도 필요합니다. 한 가지 은사만으로 교회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다양한 지체들이 함께 세워 가는 공동체입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바울은 일련의 질문을 던집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 묻습니다(고전 12:29-30). 이 질문들의 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직분을 맡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은사에 대한 획일주의를 분명히 거부합니다. 어떤 은사가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나 교회에서 특정 은사를 신앙의 표지처럼 강요한다면, 그것은 고린도전서 12장의 원리와 맞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 사도가 아닙니다. 다 선지자가 아닙니다. 다 교사가 아닙니다. 다 방언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고전 12:29-30).

이 원리는 성도에게 자유를 줍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사역하지 않는다고 해서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십니다(고전 12:11). 그러므로 성도는 남의 은사를 흉내 내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충성하면 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교회 안의 은사 강요를 경계합니다. 어떤 은사를 모든 성도의 표준으로 만들면, 그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열등감에 빠지고,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지나치게 높였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특정한 체험이나 은사를 절대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몸의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고전 12:31). 이 말은 은사를 사모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한 은사를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이 답을 줍니다. 바울은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합니다(고전 12:31). 그 가장 좋은 길은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13장으로 이어져야 온전히 이해됩니다. 은사가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 13:1-3). 그러므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은 더 화려한 은사를 통해 자신을 높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더 깊이 세우는 길, 곧 사랑의 길로 나아가라는 초청입니다. 은사는 사랑 안에서만 바르게 사용됩니다.

이 점에서 12장은 은사론의 기초이고, 13장은 은사론의 심장입니다. 12장은 은사의 다양성과 몸의 원리를 가르치고, 13장은 그 모든 은사가 사랑 없이는 무의미함을 가르칩니다. 14장은 그 사랑의 원리가 예배의 질서와 은사 사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12–14장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론: 한 성령, 한 몸, 한 사랑의 길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몸 됨을 가르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장은 은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를 풍성하게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의 근원과 목적과 사용 방식을 바로잡습니다. 은사는 한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 목적은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고전 12:4, 7).

이 장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첫째, 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한 바른 분별 기준을 제시합니다. 성령의 참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합니다(고전 12:1-3). 둘째,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다양하지만 성령과 주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합니다(고전 12:4-6). 셋째,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고전 12:7). 넷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들 분별, 방언, 통역 같은 다양한 은사를 나열하며, 이 모든 것은 한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고 말합니다(고전 12:8-11). 다섯째, 교회는 한 몸이고 성도는 많은 지체이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고전 12:12-13). 여섯째, 열등감에 빠진 지체와 우월감에 빠진 지체 모두를 교정하며, 하나님께서 몸을 고르게 하셔서 서로 돌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2:14-26). 마지막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이며, 모든 사람이 같은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 뒤, 더 큰 은사와 가장 좋은 길을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2:27-31).

고린도전서 12장의 핵심은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은사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받은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 은사가 작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몸 안에 필요한 자리에 두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2:18). 또한 성도는 다른 지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눈이 손에게, 머리가 발에게 “너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 12:21).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쓸모없는 지체가 없습니다.

이 장은 오늘날 교회에 매우 실제적인 교훈을 줍니다. 교회는 은사를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를 발견하고 사용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은사가 사람을 높이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은사의 목적은 유익입니다. 교회를 세우지 않는 은사 사용, 사랑을 무너뜨리는 은사 사용, 질서를 깨뜨리는 은사 사용은 성령의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는 약한 지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몸을 고르게 하시고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셨습니다(고전 12:24). 그러므로 교회는 능력 있고 눈에 띄는 사람만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조용히 섬기는 사람, 아픔을 견디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돌보는 사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충성하는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함께 고통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고전 12:26).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보다 더 큰 사랑의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고전 12:31). 그 길은 곧 13장에서 설명되는 사랑입니다. 은사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고전 13:1). 교회는 은사로 움직이지만, 사랑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성령의 은사를 나의 자랑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내 은사가 작다고 생각하여 몸에서 물러나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약한 지체를 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나는 한 지체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의 영광을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고전 12:27).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 자리를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눈은 눈으로, 귀는 귀로 몸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은사의 경쟁장이 아니라 성령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나 은사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지체됨을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지체를 멸시하지 마십시오. 다양성을 기뻐하십시오. 그러나 한 몸 됨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은사가 사랑 안에서 사용되도록 가장 좋은 길을 따라가십시오. 이것이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의 길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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