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장 강해

 

고린도전서 9장 강해

복음 사역자의 권리와 자유

고린도전서 9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 사역자의 권리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권리를 복음을 위해 어떻게 내려놓았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우상 제물 문제를 다루며, 성도의 자유가 사랑 안에서 절제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고전 8:13). 이제 9장에서 바울은 그 원리를 자기 삶에 적용합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었지만,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 말합니다(고전 9:1). 이 질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거나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바울이 사례를 받지 않고 일한 것을 두고, 참된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고전 9:1).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 길 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바울 사도직의 결정적 근거였습니다. 그는 사람에게서 임명받은 종교 교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부름받은 사도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 자체가 그의 사도직의 열매였습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는 말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고전 9:1).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말합니다(고전 9:2).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적 사역의 살아 있는 증거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 교회가 된 것은 바울이 주께 보냄받은 사역자였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명예를 위해 사도권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도권이 흔들리면 그가 전한 복음의 권위도 함께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변호는 단순한 자기 방어가 아닙니다. 그는 이 장 전체에서 사도의 권리를 설명한 뒤, 그 권리를 복음을 위해 내려놓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복음 사역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를 자기 유익을 위해 끝까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얻고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이 장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깊은 원리를 줍니다. 성도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와 권리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사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권리를 주장할 줄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필요할 때 그 권리를 내려놓을 줄 아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바울은 바로 그 복음적 자유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먹고 마실 권리와 사역자의 생활권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고 묻습니다(고전 9:4). 이것은 복음 사역자가 사역을 통해 생활의 공급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역자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원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어 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 말합니다(고전 9:5). 다른 사도들, 예수님의 형제들, 베드로는 아내와 함께 사역했고, 교회로부터 생활의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도 그런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신으로 사역했지만, 원칙적으로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사역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은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고 묻습니다(고전 9:6).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도 때로 직접 일하여 생계를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사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지원받을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도 다른 사역자들처럼 사역을 위해 생계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일상생활의 예를 듭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고전 9:7). 군인은 자신의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 떼의 젖을 마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역자는 자신이 섬기는 사역을 통해 생활을 공급받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합니다.

이 비유들은 사역자의 권리를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 줍니다. 복음 사역은 영적인 일이지만, 사역자는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먹고 마셔야 하며, 생활해야 하고, 가족을 돌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사역자를 영적인 존재처럼만 생각하며 생활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도 인간으로 지으셨고, 그들의 수고가 합당한 돌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권리는 특권적 군림의 근거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역자의 생활권은 복음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거나 성도 위에 군림할 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책임 있게 공급하는 원리입니다. 사역자의 필요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사역자가 그 권리를 탐욕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균형을 배워야 합니다. 사역자를 가볍게 여기거나 그의 생활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사역자 역시 자신의 권리를 복음보다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했지만, 그 권리를 언제나 복음의 유익 아래 두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의 중요한 균형입니다.

율법이 증언하는 사역자의 권리

바울은 자신의 주장이 단지 인간적 상식에만 근거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고 합니다(고전 9:8). 이어서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합니다(고전 9:9). 이 말씀은 원래 일하는 소가 곡식을 밟아 탈곡할 때 그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규정입니다.

바울은 이 율법의 원리를 복음 사역자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에게도 일한 대가를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그 사역을 통해 생활을 공급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 말합니다(고전 9:9-10). 이는 하나님께서 동물을 전혀 돌보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돌보십니다. 다만 그 율법 안에는 인간 공동체와 사역의 원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10). 일하는 사람은 그 수고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아무 열매도 기대하지 않고 밭을 갈지 않듯, 사역자도 자신의 수고에 대해 정당한 공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이어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말합니다(고전 9:11).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이라는 신령한 씨를 뿌렸습니다. 그 복음을 통해 성도들은 구원을 알고, 성령을 받고,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육적인 것, 곧 물질적 필요로 바울을 섬기는 것은 과한 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적 사역과 물질적 공급의 관계를 가르칩니다. 교회는 말씀 사역을 단지 공짜로 소비하는 서비스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영혼을 돌보고, 교회를 세우는 일은 귀한 수고입니다. 성도는 영적 유익을 받았다면 물질적 책임을 통해 그 사역을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역자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고 말합니다(고전 9:12). 고린도 교회가 다른 사역자들을 지원했다면,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은 더욱 그런 권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 놀라운 반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고전 9:12).

이 구절이 고린도전서 9장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바울은 권리가 없어서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권리가 있었지만,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영적 우선순위가 드러납니다. 권리보다 복음이 먼저입니다. 자기 유익보다 복음의 전진이 먼저입니다. 사역자의 정당한 권리도 복음의 유익 아래 놓여야 합니다.

성전 봉사와 복음 사역의 원리

바울은 사역자의 생활권을 다시 성전 봉사의 예로 설명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고전 9:13). 구약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 봉사를 담당했고, 그들은 백성이 드린 제물과 십일조를 통해 생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복음 사역에도 적용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9:14).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0).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활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 사역자를 책임 있게 섬기는 것은 단순한 인간적 관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사역자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물질적 책임을 나누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사역자의 생활을 지나치게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영적 헌신만 요구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자신의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고전 9:15).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게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가 정당했음을 밝히되,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을 자랑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자랑은 교만한 자기 과시가 아닙니다. 그는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복음 자체가 너무 귀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도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 사역이 돈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자유를 봅니다. 그는 권리를 가질 만큼 자유로웠고, 그 권리를 내려놓을 만큼 더 자유로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리가 없어서 포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권리가 있음에도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적 자유입니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복음을 위해 권리를 내려놓을 때, 그 자유는 가장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오늘날 사역자와 교회 모두 이 말씀을 균형 있게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 사역자의 정당한 생활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동시에 사역자는 물질적 권리가 복음보다 앞서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물질을 받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 때문에 복음의 순수성이 의심받고, 사역이 거래처럼 보이며, 성도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지혜롭게 절제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의 우선성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바울은 이제 복음 전파에 대한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 합니다(고전 9:16). 바울에게 복음 전파는 선택 가능한 직업이나 자기 성취의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이었고,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고전 9:16). 이것은 사명자의 거룩한 부담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 특별히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고 자랑하지 않듯이, 바울은 복음 전파를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소명의 무게를 봅니다. 소명은 단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복음의 사명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인이었지만, 복음에는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맡았노라”고 말합니다(고전 9:17). 복음 전파는 바울의 자발적 열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맡겨진 청지기적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였습니다(고전 4:1).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그 청지기 정신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상은 무엇입니까?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18). 바울에게 상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상은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기쁨,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복음의 자유를 드러내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고, 그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 사역의 동기를 살피게 합니다. 우리는 왜 사역합니까? 인정받기 위해서입니까? 생계를 위해서입니까?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사역자는 생활해야 하고, 공동체의 인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의 가장 깊은 동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사역이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변하면, 복음은 흐려집니다.

성도에게도 이 원리는 적용됩니다. 복음은 목회자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자기 자리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만 은혜를 누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세상 속에서 증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는 바울의 고백은 모든 성도에게 선교적 긴장을 줍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사도적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직장과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바울은 그 능력을 알았기에 복음 전파를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자유인

바울은 이제 자신의 선교적 태도를 밝힙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19).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9장의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종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들의 죄나 욕망에 굴복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진리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문화적 권리와 개인적 선호, 생활 방식의 자유를 내려놓고 상대에게 다가갔습니다. 이것이 선교적 사랑입니다.

바울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입니다(고전 9:19). 여기서 얻는다는 말은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그리스도께 얻기 원했습니다. 그의 모든 적응과 낮아짐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0).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율법에 정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주의적 의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들의 문화와 양심을 고려하며 다가갔습니다. 그는 불필요한 걸림돌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0).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의 관습을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들에게 맞추었습니다.

반대로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1). 여기서 율법 없는 자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의 문화적 율법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삶의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법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법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에서 자유로웠지만,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선교적 적응은 방종이 아닙니다. 문화적 유연성은 진리의 타협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선교와 목회에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상대의 언어와 문화, 상황과 고민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복음의 본질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에 다가가야 하지만, 세상과 같아져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 낮아져야 하지만, 죄를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선교적 자유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었습니다.

약한 자에게 약한 자처럼 됨

바울은 계속해서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2). 여기서 약한 자는 고린도전서 8장에서 말한 약한 양심을 가진 성도들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강한 지식과 자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약한 자 앞에서는 그들의 양심을 고려하여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약한 자에게 약한 자처럼 된다는 것은 거짓으로 연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 수준으로 내려가 섬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더 많이 알고 더 자유롭다는 이유로 약한 자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복음 안에서 세워지도록 자신의 자유를 절제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8장의 결론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2). 이 말씀은 때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상황에 따라 진리를 바꾸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을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 자신의 문화적 태도, 생활 방식의 자유를 유연하게 조정했습니다.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 전도의 간절함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모두를 얻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열매를 위해 자신의 편안함과 선호를 내려놓았습니다. 선교는 사람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상대의 자리까지 낮아져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 익숙한 예배 방식, 익숙한 문화, 익숙한 교회적 관습을 절대화합니다. 물론 전통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복음 자체와 문화적 형식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교회는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질문을 이해하며, 그들이 있는 자리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은, 바울의 적응은 구원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여러 모습이 된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자신을 바꾼 것도 아닙니다. 그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그렇게 했습니다(고전 9:22). 선교적 유연성의 기준은 인기나 편의가 아니라 복음의 구원 목적입니다.

또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3).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였지만 동시에 복음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였습니다. 복음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일 뿐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낮아지고, 모든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그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삶 전체를 선교적으로 바꿉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합니까? 무엇을 위해 말합니까? 무엇을 위해 관계를 맺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9:23). 성도에게도 이 방향이 필요합니다. 직업도, 가정도, 재능도, 인간관계도, 자유도 복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달리는 자처럼

바울은 이제 운동 경기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합니다(고전 9:24). 고린도 근처에서는 이스미아 경기라는 유명한 운동 경기가 열렸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경기자의 훈련과 경쟁, 상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합니다. 경기장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렇게나 달리지 않습니다. 목표가 있고, 방향이 있으며, 상을 바라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상을 바라보며 목적 있게 달려야 합니다. 바울은 “상을 받도록 달리라”고 권면합니다(고전 9:24).

여기서 상은 공로주의적 구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충성의 길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상을 바라보며 헛되이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사명을 위해 달려갔습니다. 구원은 은혜이지만, 은혜는 성도를 게으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성도를 달리게 합니다.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합니다(고전 9:25). 경기자는 승리를 위해 식사, 수면, 훈련, 생활 습관을 절제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않습니다. 몸을 관리하고, 시간을 사용하며, 목표에 맞지 않는 것을 내려놓습니다. 세상의 경기자도 썩을 승리의 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절제한다면,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는 성도는 얼마나 더 절제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합니다(고전 9:25). 고대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관은 월계수나 나뭇잎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썩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바라보는 상은 썩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과 칭찬,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성도의 절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보여 줍니다. 절제는 단지 금욕적 자기 괴롭힘이 아닙니다. 절제는 더 큰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작은 것을 내려놓는 능력입니다. 운동선수가 승리를 위해 식단과 훈련을 절제하듯,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욕망과 습관, 시간과 자유를 절제합니다. 절제는 사랑과 사명을 위한 훈련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제 그는 그것을 경기자의 절제로 설명합니다. 권리를 내려놓는 것은 우연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한 훈련된 선택입니다.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자신을 절제했습니다. 그는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 자유를 다스렸습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절제는 매우 필요합니다. 우리는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소비하고 싶은 대로 소비하라는 문화가 강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경기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상을 바라보며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시간 사용과 관계, 물질과 몸의 욕구에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향방 없이 달리지 않음

바울은 자신의 삶을 다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고전 9:26). 바울의 사역과 삶에는 분명한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렇게나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표를 알고 달렸습니다. 또한 권투 선수가 허공을 치지 않고 상대를 정확히 치듯, 바울은 목적 없는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향방 없는 달음질”은 목적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열심이 곧 충성은 아닙니다. 방향 없는 열심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때로는 잘못된 곳으로 데려갑니다. 바울은 열심이 많았지만, 그 열심은 복음이라는 방향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을 얻고, 복음에 참여하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았습니다(고전 9:22-25).

성도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물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인정입니까, 돈입니까, 편안함입니까, 자기 만족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복음입니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위험합니다. 바울은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바른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 줍니다.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는 말은 영적 싸움에도 정확한 목표와 훈련이 필요함을 말합니다(고전 9:26). 성도는 막연히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싸우되 구체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유혹의 통로를 분별하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며, 복음을 위해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허공을 치는 신앙은 열심은 있어도 변화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7). 이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을 학대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몸을 죄의 욕망에 내맡기지 않고, 복음의 목적 아래 복종시킨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몸은 음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있다고 했습니다(고전 6:13). 이제 그는 자신의 몸도 사명의 도구로 훈련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절제와 훈련을 의미합니다. 잠, 음식, 성적 욕망, 안락함, 말, 시간, 감정, 육체적 습관이 주님의 뜻 아래 놓여야 합니다. 성도는 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의 욕망이 주인이 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입니다(고전 6:20). 그러므로 몸은 복음의 목적 아래 훈련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자신을 훈련합니까?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27). 여기서 “버림을 당한다”는 말은 경기에서 실격 처리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기 삶이 복음에 합당하지 않게 될 위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설교자라는 직분이 자동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사역자에게 특히 두려운 경고입니다. 남에게 말씀을 전하고도 자기 자신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도 자신의 삶은 훈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봉사하고, 사역하면서도 자기 영혼을 방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과 삶을 복음 아래 복종시켰습니다.

성도에게도 동일합니다. 신앙의 말과 실제 삶이 분리되면 위험합니다. 남에게는 좋은 말을 하면서 자기 욕망에는 관대하고, 교회에서는 봉사하지만 은밀한 삶은 무질서하며, 복음을 말하면서 자기 권리와 쾌락에는 절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린도전서 9장의 경고 앞에 서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남을 가르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을 복종시키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결론: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라

고린도전서 9장은 바울의 사도권 변호로 시작하지만, 그 중심은 복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권리 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유인이며 사도이고, 고린도 교회가 자신의 사도직의 인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1-2). 그는 복음 사역자로서 먹고 마실 권리, 가정을 동반할 권리, 사역을 통해 생활의 공급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설명합니다(고전 9:4-14). 이 권리는 일상의 상식, 율법의 원리, 성전 봉사의 질서, 주님의 명령에 근거한 정당한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었습니다(고전 9:12). 바울에게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도 복음의 유익 앞에서는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말한 사랑으로 절제되는 자유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 장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과 자유를 밝힙니다(고전 9:1-3). 둘째, 그는 복음 사역자가 생활의 공급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여러 예와 율법, 주님의 명령으로 설명합니다(고전 9:4-14). 셋째, 그는 그 권리를 쓰지 않은 이유가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12, 15-18). 넷째, 그는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9:19-23). 다섯째, 그는 경기자의 비유를 통해 성도가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절제하고 훈련해야 함을 가르칩니다(고전 9:24-27).

고린도전서 9장의 핵심은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자유인이지만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몸을 쳐 복종하게 했습니다. 그의 삶은 복음이라는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는 고백이 이 장의 중심을 잘 보여 줍니다(고전 9:23).

오늘날 성도는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나는 내 권리를 복음보다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자유가 형제를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만 사용되고 있습니까? 나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낮아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취향과 방식만 고집하고 있습니까? 나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절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순간의 만족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사역자에게도 엄중합니다. 복음 사역자는 정당한 생활권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역자는 그 권리를 복음보다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역자의 영광은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사역자의 권리를 분명히 했지만, 동시에 그 권리를 복음 아래 복종시켰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선교적 삶을 요구합니다. 성도는 자기 세계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 율법 없는 자처럼, 약한 자에게 약한 자처럼 다가간 바울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고전 9:20-22). 복음의 본질은 바꾸지 않되, 사람들을 얻기 위해 낮아지고 배우고 섬기며 다가가야 합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유연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9장은 신앙생활을 경기자의 훈련으로 보게 합니다. 성도는 향방 없이 달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허공을 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달리는 사람입니다(고전 9:25-26). 그러므로 몸과 욕망, 시간과 자유, 권리와 습관을 주님의 뜻 아래 복종시켜야 합니다. 자신을 훈련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말하면서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숙한 자유의 길입니다. 성도는 자유롭지만 사랑을 위해 종이 됩니다. 권리가 있지만 복음을 위해 내려놓습니다. 지식이 있지만 약한 자를 배려합니다. 사명이 있기에 절제합니다. 그리고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끝까지 달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의 자유가 복음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저의 권리가 사랑 안에서 절제되게 하옵소서. 저의 삶이 향방 없는 달음질이 되지 않게 하시고,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낮아지게 하시고,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끝까지 충성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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