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장 강해

고린도전서 11장 강해

예배의 질서와 성찬의 거룩

고린도전서 1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예배 가운데 남자와 여자, 머리와 권위, 창조 질서와 공동체의 덕을 다루는 부분입니다(고전 11:2-16). 둘째는 고린도 교회가 성찬을 왜곡한 문제를 책망하고, 주의 만찬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부분입니다(고전 11:17-34). 두 주제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깊은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질서 있고 거룩하게 예배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많다고 해서 예배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열, 자랑, 무질서, 계층 간 차별, 성찬의 왜곡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11장에서 예배의 외적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안에 드러나는 신학적 질서와 사랑의 태도, 공동체의 거룩을 다룹니다.

11장 1절은 사실 앞 단락의 결론이면서 11장의 문을 여는 말씀처럼 읽힙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고전 11:1).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고,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0:31-33). 그러므로 11장에서도 예배의 질서와 성찬의 문제는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과 연결됩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사람의 자기표현만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구속의 은혜, 그리스도의 주권과 교회의 하나 됨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유를 말했지만, 그 자유가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은사를 말했지만,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성찬을 행했지만, 그 성찬이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리로 변질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너무 쉽게 개인 취향의 문제로 만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형식이 편한가, 어떤 분위기가 좋은가, 어떤 방식이 나에게 은혜로운가만 묻습니다. 물론 예배의 형식과 문화적 표현은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사랑과 질서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1장은 단순히 고대 고린도의 머리 덮개 관습이나 성찬 절차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은 더 깊이 묻습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유를 사랑 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르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의 몸을 분별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들이 고린도전서 11장의 핵심입니다.

전통을 지키는 교회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를 칭찬합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 말합니다(고전 11:2). 고린도전서 전체를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많이 책망합니다. 그러나 그는 책망하기 전에 그들이 지키고 있는 부분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목회적 지혜입니다. 그는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지만, 무조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전통”은 사람의 유전이나 형식주의적 관습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교회에 전해 준 가르침, 곧 복음과 예배와 교회 생활에 관한 사도적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신약 교회는 자기 마음대로 신앙을 만든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과 가르침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대마다 변할 수 있는 문화와 변하지 말아야 할 사도적 진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해 준 것을 어느 정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전통의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형식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담아야 할 복음의 의미를 잃으면 문제가 됩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의 만찬을 행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고, 어떤 사람은 배부르고 어떤 사람은 시장한 채 남겨졌습니다(고전 11:21). 형식은 있었지만 사랑과 분별은 없었습니다.

교회는 전통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전통은 앞선 믿음의 세대가 말씀을 따라 지켜 온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러나 전통을 절대화해도 안 됩니다. 전통은 복음을 섬겨야지 복음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칭찬한 전통은 사도적 복음에 뿌리를 둔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키는 관습은 복음을 드러내고 있는가? 우리의 예배 형식은 하나님의 질서와 사랑을 담고 있는가? 우리의 전통은 성도를 세우는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예배 질서를 다루면서 당시 고린도 사회의 문화적 상징을 사용합니다. 머리, 머리 덮개, 남녀의 명예와 수치, 창조 질서 같은 요소들이 얽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본문을 적용할 때는 당시의 문화적 형식을 그대로 기계적으로 반복할 것인지보다, 그 형식이 담고 있던 신학적 원리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남녀의 상호 의존성, 예배의 품위, 공동체를 세우는 태도입니다.

바울의 칭찬은 또한 신앙이 기억과 전승의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매 세대가 새로 발명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받았고, 그 복음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억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사도적 가르침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거룩한 질서를 기억합니다.

머리의 질서와 상징

바울은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고전 11:3).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논쟁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머리”는 단순히 신체의 머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권위, 근원, 대표성, 질서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관계의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고전 11:3). 남자는 자기 자신이 궁극적 주인이 아닙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남성의 우월성을 말하기 전에 남성의 종속성을 먼저 말합니다. 남자는 그리스도 아래 있는 자입니다. 남자가 교회와 가정에서 어떤 책임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만 정당합니다.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 남성의 권위는 성경적 권위가 아닙니다.

둘째,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고전 11:3). 이 표현은 남자가 여자보다 본질적으로 더 가치 있거나 더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칩니다(창 1:27). 또한 바울은 조금 뒤에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다”고 말하며 남녀의 상호 의존성을 분명히 합니다(고전 11:11).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가치의 우열이 아니라 질서와 대표성의 문제로 이해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고전 11:3).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구속 경륜 안에서 성자께서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성자는 성부께 복종하셨지만, 그 복종은 열등함의 표시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질서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의 질서는 가치의 차등이 아니라 관계적 질서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적 질서는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방식은 폭력이 아니라 자기희생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에게 머리라는 말도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군림이 아니라 책임이며, 억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질서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예배 안에서 이 질서의 상징이 흐려졌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머리를 덮거나 덮지 않는 문제는 성별, 결혼 상태, 명예와 수치, 권위의 인정과 관련된 상징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배 중 남자와 여자가 그 상징을 무시함으로 공동체적 혼란과 불명예를 가져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머리 덮개라는 관습을 그대로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 교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원리는 남아 있습니다. 예배는 자기표현의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질서를 존중하는 자리입니다. 남녀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 질서는 사랑과 상호 의존,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귀함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남자의 머리와 여자의 머리

바울은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고전 11:4). 반대로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11:5). 이 말씀은 당시 예배 가운데 남녀가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여자가 기도하고 예언하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배 중 그 행위가 공동체의 질서와 명예를 해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 남자가 머리를 덮고 공적 예배 행위를 하는 것은 특정 이교 제사 관습과 연결되었거나, 남성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겨졌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은 결혼한 여성의 정숙함과 사회적 명예를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화적 상징 안에서 복음의 자유가 무질서와 수치의 방식으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머리를 욕되게 한다”는 표현입니다(고전 11:4-5).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했습니다(고전 11:3). 따라서 예배 중 머리의 상징을 무시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공동체의 명예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됩니다. 바울은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1:5). 당시 여성에게 머리를 밀거나 짧게 자르는 것은 수치나 부정적 의미를 가졌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이 그 문화 안에서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행동이라면, 그것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자유가 공동체 안에서 불명예와 혼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을 오늘날 적용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의 문화적 관습과 오늘 우리의 문화적 관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이 본문을 근거로 여성의 머리 덮개를 지금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반면 많은 보수적 해석자들은 이 본문이 당시 문화적 상징을 통해 표현된 창조 질서와 예배 질서의 원리를 말한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예배의 품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남녀의 상호 존중, 공동체를 세우는 태도입니다.

또한 이 본문을 여성 억압의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성이 예배 중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전제합니다(고전 11:5). 이것은 여성이 예배 공동체 안에서 영적 은사를 따라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참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공동체적 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여성의 영적 가치를 낮추는 말씀이 아니라, 예배 가운데 남녀 모두가 질서 있게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말합니다.

오늘날 예배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필요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예배의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복장, 태도, 언어, 몸가짐, 사역 방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공동체를 세우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배는 나를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입니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은사는 질서 안에서, 참여는 겸손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 질서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창조 질서와 연결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7). 이 말씀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그러므로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하고 여자를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서는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와 관계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남자가 먼저 지음받고, 여자가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받은 창조 질서가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취하여 지음받았고, 남자와 함께 한 몸을 이루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 관계 안에서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표현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8-9). 이것은 창세기 2장의 하와 창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그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은 열등한 보조자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돕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실 때도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부족함을 채우는 존귀한 동반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창조 질서가 예배 가운데 상징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 합니다(고전 11:10). 이 구절은 해석이 매우 어렵습니다. “천사들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예배에 천사들이 함께한다는 인식, 또는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는 하늘의 존재들이 예배 질서를 목격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곤 합니다. “권세 아래에 있는 표”는 여성이 권위와 질서를 인정하는 상징으로 머리 덮개를 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여성의 종속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흥미롭게도 “권세”라는 말은 여자가 자기 머리 위에 가지는 권위를 뜻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즉 머리 덮개는 단지 억압의 상징이 아니라, 여성이 예배 가운데 정당하게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는 질서 있는 권위의 표지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예배가 하늘과 땅 앞에서 거룩한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창조 질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창조 질서를 폐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두 구원의 은혜를 동일하게 누리지만, 그렇다고 창조 안에 세워진 관계의 질서와 상징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임을 말하지만, 그것은 남녀의 창조적 구별과 관계 질서를 모두 없앤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은 남녀를 구원 안에서 동등하게 세우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사랑 안에서 회복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창조 질서와 구속의 은혜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합니다. 동시에 남자와 여자는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창조되었고,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하나님 앞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성경적 남녀 이해는 지배와 경쟁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질서, 사랑과 책임입니다.

주 안에서의 상호 의존

바울은 혹시 앞의 말이 남성 우월주의로 오해될 수 있음을 아는 듯, 곧바로 균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창조 질서를 말하면서도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의존성을 분명히 합니다.

남자는 여자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남자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시작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지만, 그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를 통해 태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12). 결국 남자와 여자 모두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남자도 여자를 자랑하며 교만할 수 없고, 여자도 남자와 분리되어 자기 독립성을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이 말씀은 남녀 관계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합니다. 가정과 교회, 인류 사회는 남녀의 상호 의존 안에서 세워집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경쟁 관계로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보완하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주 안에는”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고전 11:11). 자연적 관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두 은혜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남자의 권위도 주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여자의 순종과 협력도 주 안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주 밖에서는 질서가 지배로 변질되고, 자유가 방종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질서가 사랑으로, 자유가 섬김으로, 차이가 조화로 변화됩니다.

이 구절은 앞 단락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바울은 남자가 여자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적 질서를 말하지만, 동시에 둘의 상호 의존과 공동의 근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근거로 여성을 낮추거나 남성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울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균형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 질서와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서를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로 오용해서도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모두 주 안에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교회는 남녀가 서로 경쟁하며 권리를 다투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은사와 부르심을 존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바울의 결론은 인간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2). 이 말씀은 모든 교만을 꺾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우월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향해 독립적 자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과 질서와 은혜는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가운데 남녀 모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본성과 관습, 그리고 교회의 질서

바울은 이제 고린도 성도들에게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 합니다(고전 11:13). 바울은 단순히 명령만 하지 않고, 당시 문화와 자연적 감각, 공동체의 관습을 통해 분별하게 합니다. 그는 예배의 질서가 단순한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인정하는 품위와 관련된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 말합니다(고전 11:14). 반대로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 합니다(고전 11:15). 여기서 “본성”은 생물학적 본성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성별의 명예와 수치에 대한 감각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적용이 쉽지 않습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머리 길이에 대한 기준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남자의 긴 머리가 수치로 여겨졌고, 어떤 문화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적용할 때, 특정 머리 길이를 절대적 규칙으로 만들기보다, 남녀의 창조적 구별과 예배의 품위, 공동체 안에서 불필요한 혼란을 피하는 원리를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16). 이는 고린도 교회가 자기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도적 교회들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자기 공동체의 자유만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지켜 온 질서와 덕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공교회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역 교회는 독립된 공동체이지만, 고립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도적 복음과 보편 교회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자기들만의 자유와 취향을 내세우며 모든 교회의 질서와 전통을 무시하면 위험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와 자유를 자랑했지만,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함께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배의 형식과 문화적 표현에서 자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공동체의 덕을 해치고, 성도의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품위를 무너뜨린다면 재고해야 합니다. 예배는 개인의 개성을 과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은 시대적 문화와 신학적 원리가 함께 얽혀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당시의 머리 덮개 관습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지에 대해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 원리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라. 예배 가운데 남녀의 창조적 구별과 상호 존귀함을 지키라. 자유를 공동체의 덕 안에서 사용하라. 자기주장을 예배보다 앞세우지 말라.

성찬의 자리에서 드러난 분열

17절부터 바울은 매우 강하게 고린도 교회를 책망합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1:17). 앞에서는 전통을 지키는 점을 칭찬했지만(고전 11:2), 이제는 성찬의 문제에 대해서는 칭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의 모임이 교회를 세우기는커녕 해를 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임은 본래 유익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성찬과 교제, 찬양과 섬김을 통해 성도는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모임은 오히려 해로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함께 모일 때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라고 말합니다(고전 11:18).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미 분파 문제가 드러났고, 11장에서는 성찬의 자리에서 그 분열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고전 11:19). 이 말씀은 분열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악된 분열 속에서도 참된 자와 거짓된 자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의 갈등과 위기는 성도들의 본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누가 자기 유익을 구하는지, 누가 그리스도의 몸을 귀히 여기는지, 누가 사랑으로 행하는지가 드러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찬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떡과 잔만의 의식이 아니라, 공동 식사와 연결된 주의 만찬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도들이 함께 식사하며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성찬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그 식탁이 사랑의 식탁이 아니라 차별과 자랑의 식탁이 되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먼저 와서 자기 음식을 먹고 배부르며 심지어 취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늦게 와서 먹을 것이 없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고전 11:21-22).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20). 겉으로는 주의 만찬을 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주의 만찬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만찬의 정신인 그리스도의 자기희생과 교회의 하나 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형식은 있었지만 본질은 없었습니다. 성찬이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하는 사랑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무거운 경고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행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예전이 있어도 공동체의 덕이 없으면, 성찬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몸을 무시하면, 우리의 모임은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의 분열과 차별은 성찬의 의미를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음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로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배부르고 누군가가 부끄러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성찬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찬 왜곡을 매우 강하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 묻습니다(고전 11:22). 이 질문은 고린도 교회의 죄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겼고, 가난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고린도 사회는 계층 차이가 뚜렷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넓은 집에서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고, 여유 있는 시간에 먼저 모일 수 있었습니다. 반면 노예나 노동자, 가난한 성도들은 늦게 올 수밖에 없었고, 가져올 음식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성도들이 먼저 와서 자기 음식을 먹고 나눔 없이 배불렀다면, 성찬의 자리는 세상의 계층 구조를 그대로 재현한 자리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공동체여야 합니다. 세상은 가진 자를 높이고 없는 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세상은 힘 있는 자의 식탁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식탁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 식탁에서는 모두가 은혜로 초대받은 죄인입니다. 누구도 자기 부유함을 자랑할 수 없고, 누구도 가난 때문에 수치당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다”고 말합니다(고전 11:22). 가난한 성도를 무시하는 것은 단지 개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지체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교회를 멸시하는 일입니다.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고전 11:22).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가 부끄러움을 당한다면, 그 공동체는 복음의 정신을 잃은 것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높은 자가 자신을 높이고 낮은 자가 수치당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거꾸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말씀 앞에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식탁, 교제와 사역 안에서 누군가가 사회적 지위, 경제적 형편, 학력, 직업, 외모, 나이, 장애, 가정 형편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세상의 서열을 그대로 가져와 사람을 구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찬을 받는 우리는 정말 한 몸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말합니다(고전 11:22). 바울의 책망은 단호합니다. 성찬의 왜곡은 사소한 실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무시하는 죄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식탁을 자기 욕망과 계층 과시의 자리로 만들 수 없습니다.

주께 받은 성찬의 전통

바울은 이제 성찬의 참된 기원을 다시 가르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23). 성찬은 바울이 만든 의식이 아닙니다. 교회가 임의로 만든 전통도 아닙니다. 성찬은 주께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식탁입니다.

바울은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말합니다(고전 11:23). 이 표현은 성찬의 분위기를 깊이 새겨 줍니다. 성찬은 아무 때나 만들어진 의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배신당하시던 밤, 십자가를 앞두신 밤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가벼운 식사가 아닙니다. 성찬은 배신과 고난, 십자가와 사랑의 밤을 기억하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신 후 떼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1:24). 떡은 주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몸은 우리를 위해 찢기셨습니다. 성찬에서 떡을 먹는 것은 단지 종교적 상징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억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1:25). 잔은 주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언약이 피로 세워졌듯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피는 죄 사함과 언약 백성의 회복을 위한 대속의 피입니다.

성찬의 중심 명령은 “나를 기념하라”입니다(고전 11:24-25). 기념은 단순히 머리로 과거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기념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현재의 믿음으로 붙들고, 그 사건에 의해 정체성과 삶이 새롭게 규정되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을 때 성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나는 그 피로 세운 새 언약 백성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이 기념을 잃은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찬의 자리에서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계층을 드러내고,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자기를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내어주셨는데, 성도가 자기 음식조차 형제와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찬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은 습관적 의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는 자리입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새 언약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 은혜에 합당하게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성찬은 십자가와 교회를 함께 기억하게 합니다.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식탁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26). 성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품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현재에는 교회가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참여가 있습니다. 미래에는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있습니다.

성찬은 먼저 주의 죽으심을 전합니다(고전 11:26). 교회는 성찬을 통해 십자가를 선포합니다.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잔이라는 보이는 말씀을 통해 선포합니다. 성찬은 복음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음을 계속 교회 앞에 세웁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의 교회가 아닙니다.

성찬은 또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행해집니다(고전 11:26). 이것은 성찬이 종말론적 소망의 식탁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지만, 죽음으로 끝난 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다시 오십니다. 성찬은 십자가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재림의 기다림입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교회는 떡과 잔을 나누며 복음의 소망을 붙듭니다.

성찬은 그러므로 단순한 추모식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난 위인을 기억하는 기념식과 다릅니다. 성찬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언약적 교제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식탁입니다. 성도는 성찬을 받을 때 과거의 십자가와 미래의 재림 사이에서 현재의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정체성을 깊이 세워 줍니다. 교회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중심 메시지는 인간의 지혜, 도덕적 교훈, 성공의 비결, 심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물론 교회는 삶의 여러 문제에 말씀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중심은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성찬은 교회가 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붙드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또한 성찬은 교회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성찬 앞에서 모두 같은 은혜를 받는 죄인입니다. 목회자도, 장로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지식 있는 자도, 어린아이 같은 신자도 모두 주님의 몸과 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찬의 식탁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무너뜨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높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찬을 왜곡했다는 것은 그들이 십자가의 정신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셨는데, 그들은 자기 것을 움켜쥐었습니다. 주님은 낮아지셨는데, 그들은 자신을 높였습니다. 주님은 한 몸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분열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찬의 본래 의미를 다시 가르치며, 그들이 십자가 앞에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죄

바울은 성찬의 거룩함을 말한 뒤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합니다(고전 11:27). 이 말씀은 매우 엄중합니다. 성찬은 은혜의 식탁이지만, 가볍게 다루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합당하지 않게”라는 말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완전히 죄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완전한 사람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면 아무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성찬은 의인을 위한 상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위한 은혜의 식탁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성찬의 의미를 무시하고, 회개 없는 태도와 형제 사랑 없는 삶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 합당하지 않은 참여는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찬의 자리에서 분열했고,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했으며, 자기 배를 채우고 취했습니다(고전 11:21-22). 그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28). 성찬에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성찬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나는 회개하지 않는 죄를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주님의 식탁에 나오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자기 성찰은 성찬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를 살핀 후 먹고 마시라고 말합니다(고전 11:28). 성찰의 목적은 성찬에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으로 바르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성찬을 멀리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자기 의를 가진 자의 식탁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의 식탁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 없이 가볍게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1:29). 여기서 “주의 몸”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기억하는 식탁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고린도 문맥에서는 특히 교회의 몸을 분별하지 못한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성찬에서 가난한 성도들을 무시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성찬은 개인적 경건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적 분별의 자리입니다. 주님의 몸을 기억하는 사람은 주님의 몸 된 성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그 피로 사신 형제를 부끄럽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하고, 동시에 서로에게 연결합니다.

징계와 회복의 은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실제로 하나님의 징계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고전 11:30). 이 말씀은 매우 무겁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찬 왜곡과 공동체적 죄 때문에, 그들 가운데 약함과 병과 죽음이 있었다고 바울은 해석합니다. 모든 질병이 특정 죄의 직접 결과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 경우 바울은 하나님의 징계적 손길을 분명히 말합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적용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9:3). 그러나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징계하실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합니다(고전 11:31). 자기 성찰과 회개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는 은혜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실 때, 스스로를 살피고 돌이키면 더 무거운 징계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살피지 않고 죄를 방치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징계로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을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고전 11:32). 이것은 매우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멸망시키기 위한 정죄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징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도록, 때로 아프게라도 깨우십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합니다(히 12:6).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듯,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십니다. 물론 징계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가 성찬을 모독하고 형제를 부끄럽게 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두려움과 위로를 함께 줍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찬을 왜곡하고, 교회를 업신여기고, 형제를 부끄럽게 하는 죄는 하나님 앞에서 심각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정죄가 아니라 회복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버림이 아니라 자녀로 대하시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만날 때 원망만 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물론 모든 고난을 기계적으로 죄와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살피는 것은 언제나 유익합니다. 교회도 위기와 아픔을 만날 때 조직적 해결만 찾지 말고 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몸을 분별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성찬의 십자가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닌가?

서로 기다리라

바울은 성찬 문제에 대한 실제적 결론을 말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 합니다(고전 11:33). 이 짧은 명령 안에 고린도 교회가 회복해야 할 성찬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 기다리라는 것은 단지 식사 순서를 맞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형제를 배려하고, 공동체의 하나 됨을 존중하며, 주님의 식탁에서 누구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기다리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먼저 와서 자기 음식을 먹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했습니다(고전 11:21). 성찬의 자리에서조차 자기중심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서로 기다리십시오. 성찬은 함께 먹는 식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혼자 배부른 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서로 기다리라”는 말씀은 교회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빠른 사람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강한 사람만의 공동체도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 여유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 은사가 많은 사람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를 기다리고, 늦게 오는 자를 배려하고, 부족한 자를 세우며, 함께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전체의 사랑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8장에서 바울은 약한 형제를 위해 자유를 절제하라고 했습니다(고전 8:13). 9장에서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고전 9:19-22). 10장에서 바울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0:24). 11장에서는 성찬의 자리에서 서로 기다리라고 합니다(고전 11:33). 결국 성숙한 교회는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형제를 세우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고전 11:34). 성찬의 목적은 개인의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먼저 먹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임은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한 몸 됨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이 말씀은 예배와 교회 모임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에 모일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만 생각합니까?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만 원합니까? 아니면 함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형제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까? 교회 모임이 자기중심적 욕망의 장이 되면 판단받는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기다리고 주의 몸을 분별할 때, 교회의 모임은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바울은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 말하며 장을 마무리합니다(고전 11:34). 이는 고린도 교회에 아직 더 정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를 먼저 세웁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하는 거룩한 식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배를 채우는 식탁이 아니라, 형제를 기다리고 주의 몸을 분별하는 식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결론: 주의 몸을 분별하는 교회

고린도전서 11장은 예배의 질서와 성찬의 거룩을 통해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앞부분에서는 남자와 여자, 머리와 권위, 창조 질서와 예배의 품위를 다룹니다(고전 11:2-16). 뒷부분에서는 성찬을 왜곡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며, 주의 만찬이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칩니다(고전 11:17-34).

이 장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첫째,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전통을 지킨 점을 칭찬하면서도, 예배 질서의 문제를 바로잡습니다(고전 11:2). 둘째, 그는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질서의 원리를 제시합니다(고전 11:3). 셋째, 당시 문화 속에서 머리 덮개의 상징을 통해 예배의 품위와 질서를 설명합니다(고전 11:4-10). 넷째, 남자와 여자는 주 안에서 서로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말함으로 균형을 세웁니다(고전 11:11-12). 다섯째, 교회의 관습과 예배의 덕을 따라 논쟁적 태도를 버리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1:13-16).

이어 성찬 부분에서는 첫째, 고린도 교회의 모임이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책망합니다(고전 11:17). 둘째, 성찬의 자리에서 분쟁과 계층 차별이 드러난 것을 지적합니다(고전 11:18-22). 셋째, 주께 받은 성찬의 전통을 다시 전하며,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 새 언약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고전 11:23-25). 넷째, 성찬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식탁임을 말합니다(고전 11:26). 다섯째,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죄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위험을 경고합니다(고전 11:27-29). 여섯째, 하나님의 징계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임을 가르칩니다(고전 11:30-32). 마지막으로 서로 기다리며 성찬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라고 명령합니다(고전 11:33-34).

고린도전서 11장의 핵심은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의 질서와 몸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무질서한 자기표현의 장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공동체의 덕 안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지만, 그 존귀함은 자기주장과 혼란이 아니라 질서와 상호 존중, 주 안에서의 의존성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또한 성찬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하는 새 언약의 식탁입니다.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고,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식탁입니다(고전 11:26).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자신을 살피고, 주의 몸을 분별해야 합니다(고전 11:28-29). 주님의 몸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피를 마시면서 그 피로 사신 형제를 부끄럽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말씀 앞에서 성찬과 예배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는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입니다. 성찬은 습관적 절차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 서는 자리입니다. 교회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오래 믿은 자와 처음 믿는 자가 모두 한 몸으로 주님의 은혜를 받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기다려야 합니다(고전 11:33). 서로 배려해야 합니다. 서로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찬 앞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의 몸 된 교회를 분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형제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자유, 나의 권리, 나의 배부름, 나의 자랑만을 앞세우고 있습니까?

성숙한 교회는 은사가 많은 교회만이 아닙니다. 성숙한 교회는 주의 몸을 분별하는 교회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의 몸이 나를 위해 찢기셨습니다. 주님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제가 형제를 기다리게 하옵소서. 제가 예배 안에서 질서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이것이 고린도전서 11장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예배의 길이며, 성찬의 길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길입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2026년 5월 넷째주 주일 대표기도문

2026년 3월 29일 셋째 주일 예배 대표기도문

2026년 3월 넷째 주일 예배 대표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