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5-42 묵상,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다

 

예수님을 따르는 첫 걸음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42절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첫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만남이나 호기심의 결과가 아니라,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며, 인간의 내면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출발선 위에서 시작되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어떻게 변화와 사명으로 이어지는지를 깊이 살펴보게 됩니다.

어린 양을 바라본 두 제자

35절에서 36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또 한 번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표현이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29절에서 한 번 선포한 동일한 말씀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선언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임을 말해줍니다.

이 선언을 들은 두 제자는 즉시 반응합니다. 요한복음 1장 37절은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복음의 능동성과 제자의 결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듣고’ 그리고 ‘따라갔다’는 두 개의 동사는 복음에 대한 바른 응답의 순서를 보여줍니다. 먼저 복음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그 듣는 말씀에 ‘반응’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삶의 시작입니다.

‘따라갔다’는 동사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는 단순한 뒤따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전적 헌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을 포함한 결단입니다. 이 단어는 이후 신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삶을 묘사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된 다음에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이해 이전에 순종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해는 순종 가운데 깊어지고, 믿음은 따름 속에서 자라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처럼,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초대

38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이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해, 또 그들의 동기를 점검하시기 위해 질문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정말 무엇을 구하며 따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나이까”(38절)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단지 장소의 위치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 계십니까’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깊은 갈망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더 머물고, 더 알고, 더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랍비’라는 호칭이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랍비’는 존경받는 율법 교사에게 붙이는 호칭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줄은 몰랐지만, 그분에게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태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와서 보라”(39절)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정보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관계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복음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격적 만남입니다. ‘와서 보라’는 말씀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직접 경험하라는 요청이며, 삶의 방향을 바꾸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 제자들은 그날 함께 거하였습니다. ‘거하였다’는 말도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어 ‘메노’(μένω)는 앞서 언급했듯이 단순한 일시적 방문이 아니라, 지속적인 거주와 동행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함으로써, 그들은 단순한 탐색자가 아니라 진정한 제자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진짜 제자는 예수님과 거하며, 그분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주일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으로는 결코 제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거하시고, 그분과의 교제가 일상화되어야 진정한 따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몬의 소명과 변화의 시작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40절부터 42절에서는 예수님의 첫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가 형 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드레는 요한의 제자였고, 예수님을 따른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랑하는 형제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제자의 삶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전도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절)고 말합니다. 여기서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입니다. 아직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단지 자기 확신이나 열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 깨달음입니다. 진정한 복음의 만남은 곧 고백으로 이어지고, 그 고백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생명의 역사로 확산됩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42절). 여기서 ‘보다’는 동사 ‘엠블렙사스’(ἐμβλέψας)는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깊이 통찰하는 눈길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외모나 배경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를 통찰하셨고, 그의 미래까지 내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게바’, 곧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고, 실수 많고 감정적인 시몬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정체성을 선언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는 방식입니다.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장차 변화될 모습을 보시고, 그 가능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단순한 이름 변경이 아니라, 사명 선언입니다. 앞으로 시몬은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며, 많은 신자들을 이끄는 사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되,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 이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 삶에도 이와 같은 부르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금의 나’로만 보시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변화된 나’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길을 주십니다. 이 은혜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결론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42절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전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 제자들의 반응, 예수님의 질문과 초대, 그리고 시몬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까지—모든 장면이 복음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단순한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 전체가 바뀌는 사건이며, 우리의 존재가 재정의되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진정 머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복음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가끔 글을 쓰다가 철자 하나를 틀릴 때가 있듯이, 우리의 따름도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보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변화된 존재로 부르십니다. 이제는 그 부르심에 담대히 응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주님과 거하며,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증언하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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