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1 묵상,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첫 표적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기적으로 기록된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입니다. 단순히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를 회복시키는 사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복음의 상징이며, 요한복음 전체의 표적 신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복된 주님의 사역의 시작은 창조적 능력입니다.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가나의 혼인잔치와 인간의 결핍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1절) 여기서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은 앞선 1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간 흐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구조를 모티프로 삼아 첫 장에서부터 시간의 흐름을 세밀히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새 창조’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유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행사였습니다. 이 잔치는 단지 두 사람의 결혼식이 아니라, 두 가문의 명예와 지역 사회의 결속을 나타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잔치 전체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포도주는 단지 음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 축복,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시편 104편 15절에서는 포도주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께 나아가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합니다(3절). 여기서 마리아의 요청은 단순히 상황의 전달이 아니라, 예수님께 뭔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기대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무례하게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자여’(γύναι)는 당시 공적인 자리에서 존중의 의미로 사용되던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개인적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뜻에 따라 행동하시겠다는 뜻을 밝히신 것입니다. ‘내 때’(ὥρα)는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포함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사역이 시작될 때와 방식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지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이 무엇을 하시든, 어떤 방법으로 일하시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이 항아리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로, 율법적 정결함을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물을 변하게 하십니다. 율법의 상징을 은혜와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로 바꾸시는 장면은, 예수님의 사역이 율법을 넘어 은혜를 완성하신다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물은 생명이지만, 율법 아래에서는 여전히 결핍과 한계를 드러낼 뿐입니다. 반면 포도주는 기쁨과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한계를 충만함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이 기적은, 구약의 그림자 속에 있던 모든 것이 이제 실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변하다’(γεγένηται)는 단순한 화학적 변화가 아니라,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물의 본질이 바뀌고, 새로운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이 우리 안에 임할 때 일어나는 변화와도 같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본질을 바꾸고, 과거의 공허함과 결핍을 기쁨과 생명으로 채우는 능력입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항아리를 가득 채웠고,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갔습니다. 연회장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몰랐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포도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완전하고 풍성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부족하거나 억지스러운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늘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우십니다.
때론 우리가 보기엔 상황이 너무 늦은 것 같고, 이미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실패의 순간을 오히려 영광의 기회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시간의 주인이시며,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회복을 우리 삶 가운데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첫 표적
본문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σημεῖον)이라 부릅니다. 표적은 단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징조’이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계시하는 도구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이며, 그 첫 표적이 잔치의 결핍을 채우는 일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과시하거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기적이 아닌, 부족함을 채우시고, 기쁨을 회복시키는 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살리고, 절망 속에 희망을 주시며, 깨어진 기쁨을 다시 일으키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또한 이 표적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δόξα)은 단지 빛나는 광채나 위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본성과 뜻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고, 그분의 본질적인 영광이 드러나자 제자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믿다’(ἐπίστευσαν)라는 동사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단지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진짜 기적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해 열리고, 그분을 믿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영적 잔치의 한가운데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열정이 식고, 삶의 의미가 흐려지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자리는 다시 은혜의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론 글을 쓸 때도 단어 하나를 놓치거나, 철자 하나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은 그런 작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물 같은 평범함을 포도주 같은 은혜의 충만으로 바꾸시는 주님이십니다.
결론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은 예수님의 첫 표적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기쁨이 사라진 잔치 한복판에서 가장 좋은 포도주를 예비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율법의 항아리에 담긴 물을 은혜의 포도주로 바꾸시고, 절망의 자리를 영광의 자리로 변화시키십니다.
이 첫 표적은 그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에도 동일하게 임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 안의 결핍을 채우시고,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처럼 말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인생도 표적의 자리가 되고, 영광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면 하나님의 때에 포도주로 바뀔 것입니다. 그 기적의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