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8절 묵상,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요한복음 1장 18절은 요한복음 서문의 절정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과 계시자로서의 역할을 요약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인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 유일한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선포합니다. 오랜 구약의 기대와 그림자 속에서 마침내 드러난 실체,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여기서 ‘보다’는 헬라어로 ‘헤오라켄’(ἑώρακεν)이며, 완료 시제로 기록되어 과거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지 육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영광을 직접 보고 이해하고 파악하는 일을 말합니다. 곧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감히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이 고백은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 모세조차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함과 초월성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죄인 된 인간은 그분의 본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 불가능함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이자, 구원의 본질임을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여기서 요한은 놀라운 진리를 선언합니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문장은 요한복음 전체의 요약이자,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표현을 짚어야 합니다. 먼저 “아버지 품 속”이라는 말은 단순한 위치 개념이 아니라, 친밀함과 본질적 연합을 나타냅니다. 헬라어로는 "콜폰"(κόλπον)이며, 이는 단순한 '가슴'이 아니라, '가슴에 안긴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자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적 교제와 사랑 안에 영원부터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독생하신 하나님”(ὁ μονογενὴς θεὸς)이라는 표현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매우 독특한 구절입니다. 고대 사본에 따라 일부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ὁ μονογενὴς υἱός)로도 전해지지만, 다수의 중요한 사본에서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어, 개정개역도 이를 따릅니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본질상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기독론적 정점입니다. 그분은 ‘유일한 존재 방식으로 태어난 분’이며,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지닌 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 품 속에서 그분의 모든 것을 공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성품, 아버지의 진리와 영광을 그대로 지니신 분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단지 사명을 띤 선지자의 방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오셨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 앞에서 멈춰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분, 곧 가장 깊은 친밀함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곱씹어야 합니다. 그분이 아니면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이 아니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숨어 계신 분, 멀고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타내셨느니라: 계시의 정점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짧지만, 성경 전체 계시의 방향을 집약합니다. “나타내셨느니라”는 헬라어 ‘엑제게사토’(ἐξηγήσατο)는 영어 단어 ‘exegesis’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이는 ‘깊이 설명하다’, ‘밝히 드러내다’, ‘해석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본질의 계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해석’해주신 분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철학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을 우리 가운데 보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계시의 독특함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문서나 계율의 전달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육화된 계시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도 이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본질과 동일하신 분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예수님을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예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기독론적 선언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계시는 인격적 초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설명만 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 행동, 눈빛, 침묵 하나하나가 하나님 아버지를 설명해 주시는 살아 있는 계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오타를 하나 실수로 넣었는데 잘 찾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결론: 하나님을 보이신 예수
요한복음 1장 18절은 요한복음 서론의 마지막 구절이지만, 이 말씀은 이후 펼쳐질 모든 이야기의 요약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장 깊은 내밀한 부분, 곧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선한 스승이나 감동적인 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계시가 담겨 있고, 예수님 안에 모든 진리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오신 분이며,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살아내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정의, 진리, 그리고 구속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이 계시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성령의 조명 가운데,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자리로 나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