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6절 묵상, 은혜 위에 은혜

 

충만함에서 받았노니

요한복음 1장 16절은 성경 전체 복음 메시지의 정수를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은혜를 받는다는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의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은혜의 흐름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받은 자들이며, 그분 안에서 매 순간 새롭고 충만한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요 1:16)라는 말씀은 문법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깊이 있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만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로마'(πλήρωμα)인데, 이는 단순히 가득 찼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특히 신격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골 1:19, 2:9 참조).

이 ‘충만함’은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의한 충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충만입니다. 곧, 이 충만함은 피조물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충만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인 생명과 은혜, 진리, 사랑, 거룩함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거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충만함에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험입니다.

원문에서는 이 '받다'라는 동사가 부정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영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곧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이미 받았고, 계속해서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이자 본질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된 구절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카린 안티 카리토스’(χάριν ἀντὶ χάριτος)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은혜를 대신한 은혜’입니다.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 신학자들 간의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단순히 은혜가 반복적으로 더해지는 개념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이는 모세를 통한 율법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더 깊고 풍성한 은혜를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은혜 위에 은혜’란, 첫 번째 은혜(율법)를 대신하여 두 번째 은혜(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가 온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는 단지 죄를 사해주는 기능적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는 존재 전체를 새롭게 만듭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화의 길을 걷게 하며, 결국에는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은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과거에 구원받은 사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는 끝이 없고, 매일의 삶 속에 새롭게 경험되어야 하는 살아 있는 실제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분의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 살아갑니다.

충만함에 참여하는 삶

이제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는 단지 신비적인 체험이나 어떤 특별한 사건을 기다리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며, 그 연합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충만함은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표현했습니다.

충만함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두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날마다 그분 앞에 나아가는 삶입니다. 그 충만함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스스로 교만한 자에게는 감지되지 않으며, 갈급한 자에게만 부어지는 생명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충만함에서 계속해서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지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맥락에서, 사도 요한이 이 진리를 덧붙인 이유입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을 위대한 선생으로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충만함이 거하는 분이며,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를 때, 그 충만함이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는 분이십니다.

결론: 은혜의 흐름 안에 서라

요한복음 1장 16절은 단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복음의 실제를 농축해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충만함에서 끊임없이 받는 자들입니다.

은혜는 정체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충만함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충만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부족함 없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어떤 날은 그 은혜가 체감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충만함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모든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그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충만함 안에 거하며,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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