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4 강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나사로의 부활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 첫 부분인 1절부터 4절까지는 병든 나사로의 상황과 예수님의 반응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짧은 본문은 인간적인 절박함과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가 교차하는 장면이며, 믿음과 기다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병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병든 자가 있다는 정보가 아니라, 그가 누구의 가족인지, 어디에 사는지까지 상세히 소개된다는 점입니다. 요한은 단순한 병자 나사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관계된 가정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2절은 그 마리아가 바로 주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던 마리아라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 사건이 요한복음 12장에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독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묘사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의 이야기가 이미 신앙 공동체 내에 깊이 각인된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이 가정이 예수님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아픔은 주님께 단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속에 있는 이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하나님 백성의 삶에도 고난이 스며든다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이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자들에게도 고난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님께 보내는 절박한 요청
3절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메시지를 요약합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이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간절한 호소입니다. “사랑하시는 자”—헬라어로 ‘호 필레이스’(ὃν φιλεῖς)—는 단순히 인간적인 정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적 애정이 담긴 표현입니다. 필레오라는 단어는 우정, 친밀한 애착의 감정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셔서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놀랍도록 신뢰가 담긴 표현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이 상황을 인도할 것임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는 요청보다 신뢰를 앞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자주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자매들은 그저 예수님의 사랑과 주권을 인정하며, 상황을 맡겨드립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드러나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요청을 들으신 후,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언입니다. 실제로 나사로는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은 ‘아스쎄네이아 우크 에스틴 프로스 타나톤’(ἀσθένεια οὐκ ἔστιν πρὸς θάνατον)—“이 병은 죽음을 향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죽음은 임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원리 중 하나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인생의 종말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가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사건으로 묘사되며, 1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영광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독사’(δόξα)로, 단순한 명예나 찬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속성이 드러나는 계시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전 존재와 사역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그 계시의 절정 중 하나로 기능합니다.
이 본문은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예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님의 지연된 반응은, 이후 예수님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실 때의 사건을 예시합니다. 즉,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 있다는 구속사의 역설이 이 짧은 구절에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도구로 사용하여 선한 뜻과 구속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섭리의 신학을 강조합니다.
결론
요한복음 11:1-4는 병과 고통, 죽음 앞에서의 신자의 태도와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하셔도 고통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고통이 목적이 아니라 도구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종종 우리의 예상과 다른 길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길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 허락된 병과 고통의 순간 속에서 주님의 뜻을 묻고, 그분의 영광을 기대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이 말씀 앞에, 우리는 믿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주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