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5-16 강해, 나사로가 잠들었다

 

하나님의 시간, 그리고 믿음의 길

요한복음 11:5-16은 나사로의 죽음을 둘러싼 예수님의 반응과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이해 사이의 간극을 조명해 줍니다. 특히 예수님의 의도적인 지연과 도마의 고백은 우리에게 믿음이란 무엇이며, 그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즉각적인 해결이 아니라,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한 기다림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시되 곧바로 가지 않으신 주님

5절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에가파’(ἠγάπα)—아가페 사랑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조건 없는 헌신적 사랑을 뜻합니다. 단지 감정적 애착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헌신과 선하신 의지를 담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6절은 이 사랑의 방향을 예상과 다르게 펼쳐 보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신다고 하셨지만 곧바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때 인간적인 감정으로 주님을 이해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신다면 바로 가셔서 고쳐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연은 무관심이나 소극적 반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지연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 곧 섭리의 역사 속에서 더 큰 영광을 위해 설계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때로 우리의 조급함을 견디게 하며,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섭리의 신뢰’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긴급성과 다르게 흐르며, 그분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모든 일이 아름답게 성취됩니다.

낮이 아니냐: 하나님의 인도 아래 걷는 길

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8절에서 깜짝 놀라며 말립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들의 반응은 매우 현실적이며 인간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반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9절과 10절을 통해 한 가지 깊은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표현은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명의 시간과 그것을 감당하는 자의 정체성에 관한 선언입니다. 낮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시간, 곧 예수님이 아버지의 계획 안에서 일하시는 시간을 뜻하며, 예수님은 지금 그 낮 가운데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할 시간이므로, 유대로 가는 길이 위험하다 할지라도 그 길은 실족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사명자의 걸음’을 상징합니다. 사명자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와 말씀에 따라 움직입니다. 위험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라지지 않지만, 그 뜻보다 클 수 없습니다. 빛 가운데 걷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죽음을 향한 새로운 해석

11절부터 예수님은 상황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은 처음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아직 예수님의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시각으로 해석된 ‘죽음’이라는 개념을 다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표현으로, 신자의 죽음은 멸절이나 소멸이 아니라 일시적인 상태, 즉 ‘깨어남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정의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말한 부활의 전제이기도 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적 죽음관입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매우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의 유익으로 연결지으십니다. 그 이유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단순한 동행자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권세’를 체험하는 자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닙니다. 믿음은 고난과 상실, 그리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경험에서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한 단계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상황을 바꾸는 분일 뿐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해 우리를 빚어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결론

요한복음 11:5-16은 단순한 시간 지연이나 죽음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사랑과 믿음의 길을 따라 걷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주님은 사랑하시기에 늦게 가셨고,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보셨으며, 두려움 가운데서도 빛 가운데 걷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도마는 끝에 가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장함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리라면 어디든 함께하겠다는 제자의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옳고, 주님의 길은 언제나 생명입니다.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은 결코 실족하지 않으며, 죽음조차도 생명의 문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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