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9-21 강해, 성령의 조명
성령의 조명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
요한복음 10:19-21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 비유를 말씀하신 직후의 반응을 다룹니다. 이 짧은 구절이지만,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 대한 사람들의 분열된 반응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있는 갈등을 드러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은 곧 신앙의 생명 여부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본문의 배경과 구조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단지 도덕적 선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의 영적 함의—특히 구약에서 하나님 자신이 목자로 묘사된 구절들(시 23:1, 겔 34:11-16 등)을 통해,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본문 19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스키스마”(σχίσμα)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서 분열, 단절, 갈라섬을 의미하는 강한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흥미로운 주장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면을 갈라놓는 진리의 검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친 자인가, 귀신 들린 자인가
20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여기서 “귀신 들렸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다이모니온 에케이”(δαιμόνιον ἔχει)인데, 이는 단순히 심리적 이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중대한 비정상을 의미합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사탄적인 영향력으로 돌려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불신앙이 단순한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의지적이고 고의적인 거부의 열매임을 보게 됩니다. 칼빈은 이 대목에서, 사람의 마음이 완악함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들을 능력을 상실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항상 기쁘고 은혜로운 소식이 아니라, 동시에 불신자에게는 거부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21절은 또 다른 반응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여기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앞선 9장에서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말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중요한 기적 중 하나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계시하는 이적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이 단순한 감정이나 추측이 아니라, 그분의 행하신 일에 근거한 신앙적 반응임을 보여줍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두나타이”(δύναται)라는 단어—‘~할 수 있느냐’는 표현—는 실질적 능력과 권위를 묻는 표현으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신적인 권능이 깃들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한 목자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이 본문에서 드러나는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둘로 나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 시대에만 해당되는 반응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복음은 항상 분열을 일으킵니다. 누군가는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믿고 따르고, 누군가는 듣고도 끝내 거절하고 조롱하고 돌을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세상 모두에게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양들에게는 생명의 부르심이었지만, 염소들에게는 정죄와 거절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며, 구원의 기쁜 소식이 동시에 심판의 칼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단지 인간의 취향이나 지식의 문제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조명에 달린 일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양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은 이미 아버지께 속한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들어도 누군가는 미쳤다고 비난하고, 누군가는 놀라운 기적 앞에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둘러싼 분열은 여전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피하거나 외면하고, 심지어 조롱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그분의 음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박히지 않고, 의심과 냉소로 가득 찬 채 복음을 분석하고 해체하려 듭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그 말씀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릅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 속에서 우리 자신의 심령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열리는가? 아니면 그 말씀이 내 이성에 부딪혀 불편하고 낯설기만 한가? 선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세상의 논리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 속 인물이거나 윤리적 스승에 불과한가요? 아니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하나님의 아들이신가요? 복음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신앙을 요청하시며, 또한 우리의 거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결론
요한복음 10:19-21은 짧지만 강력한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각 사람의 존재 깊은 곳을 갈라놓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반드시 반응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이 말씀은 단지 난해하고 때로는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귀가 열린 자는 그 음성에서 생명을 듣고, 다시는 그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그 길을 따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