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22-39 강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22-39은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결정적 선언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넘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이며, 동시에 양들을 향한 보호와 생명의 확증이 함께 드러나는 장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 기반 위에 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정체 선언
본문은 유대인의 절기 중 하나인 수전절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수전절은 마카비 시대의 성전 정화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예루살렘 성전 중심에서 거행되는 절기였습니다. 바로 그 성전 뜰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애워싸며 질문합니다. “당신이 메시아이면 밝히 말하소서.”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적 언사와 상징적인 말씀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단도직입적으로 그 정체를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미 대답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2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신 이 표현은,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통해 충분히 그리스도의 정체를 계시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헬라어 ‘레로카’(εἶπον, 내가 말했다)는 완료 시제로, 예수님이 단회적으로 말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 왔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말의 명확성이나 정보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믿지 않음’이었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특징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은 믿지 않아서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이미 양이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말하는 유기(遺棄)와 선택의 교리이며, 은혜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는 본문입니다.
나의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2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에는 세 가지 관계적 진리가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양을 ‘부르시며’, 양은 ‘그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양을 ‘아시며’, 이는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셋째, 양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단순히 명령이 아니라 양된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헬라어 동사 ‘아쿠우시’(ἀκούουσιν)는 현재시제로 쓰여, 지속적 듣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일회성 호소가 아니라 계속해서 양의 삶을 이끄는 권위 있는 부르심이며, 그 음성을 듣는 자는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받는다”고 해석하며, 이 듣는 귀는 성령의 역사로 열린다고 말합니다.
28절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여기서 ‘주노니’는 헬라어 ‘디도미’(δίδωμι)의 완료형으로, 예수님께서 지금도 끊임없이 자신의 백성에게 영생을 베푸시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다’는 표현은 구원의 불가역성, 즉 중생한 자는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교리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는 개혁주의 교리에서 말하는 성도의 견인을 강력히 지지하는 구절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손, 즉 그 능력과 보호하심은 절대적인 보증이 됩니다. 이 보호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의 손길이며,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손에서 양을 탈취할 수 없습니다.
29절에서는 그 보호가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되었음을 명시합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는 앞서 말한 예수님의 손과 동일하게 아버지의 손에서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는 반복된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선언은 그 모든 구원의 확실성을 결정짓는 말씀입니다.
‘하나이다’는 헬라어 ‘헨 에스멘’(ἕν ἐσμεν)은 중성 단수와 1인칭 복수의 조합입니다. 이는 본질적인 하나 됨을 말하지만, 동시에 인격의 동일함이 아닌 기능과 본성에서의 일치를 말합니다. 칼케돈 신조에서 말하듯, 성자와 성부는 동등하고 동일 본질이시지만 인격적으로 구분되며, 그 뜻과 구속사역 안에서 하나이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돌을 들어 치려 하다
31절부터 유대인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이라는 반응은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신학적 논쟁으로 듣지 않고, 신성모독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분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의도를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은 이 질문에 선한 일이 아니라 “신성모독 때문이요…”라고 답합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기적과 권능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 신적 정체성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시편 82:6을 인용한 것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재판관이나 지도자들을 ‘신’이라고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본질적인 신성이 아니라 위임된 권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성경의 권위와 정확성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이 왜 신성모독이 될 수 없는지를 논증하십니다.
36절에서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사명, 성별된 존재로서의 독특한 위치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시고,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선언은 결코 신성모독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의 선포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10:22-39은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 하나님의 일체성, 그리고 성도의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 기반 위에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손에, 더 나아가 아버지의 손에 있으며, 그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교리의 정리가 아니라, 불안정한 이 땅에서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절대적 위로이며 소망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아시고 부르셨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세상의 공격과 의심 속에서도 그 손에 붙들려 있다는 이 진리가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믿는 자, 그 이름을 힘입어 나아가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