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 묵상, 가나에서의 처음 표적, 드러난 영광

 

처음 표적, 드러난 영광과 믿음의 시작

요한복음 2장 11절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키신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그 기적의 본질적 의미를 요약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짧은 한 절 속에는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 표적의 목적,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이 처음으로 드러내신 영광이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반응을 요구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표적의 의미: 시작이자 선언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헬라어: 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이라 부릅니다. 이는 단순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건이 어떤 더 깊은 실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표적은 표면에 보이는 사건보다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에 초점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사건을 “첫 표적”(ἀρχὴν τῶν σημείων)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첫’(ἀρχὴν)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간상의 처음이 아니라, 기원, 근원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넘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본질을 갖고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와도 같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방식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표적은 갈릴리라는 주변부에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성대한 공개 장소가 아닌, 시골 마을의 작은 잔치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점은 주님의 사역이 어디서 시작되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은 중심부보다 주변부에 먼저 스며들며,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시작됩니다.

이 첫 표적은 단순히 ‘와, 신기하다’고 말할 만한 기적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물의 본질을 바꾸시는 능력자이심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이 사건은, 예수님이 창조의 질서 위에 계신 분이시며, 새 창조의 주가 되심을 증언하는 강력한 복음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요, 구속사의 전환점입니다.

영광의 드러남: 본질의 계시

요한은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여기서 ‘영광’은 헬라어 ‘독사’(δόξα)로, 단지 외적인 빛남이나 명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분의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위엄과 거룩, 진리와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종종 불 가운데 임하거나, 구름 가운데 임하거나, 성막과 성전에 가득 찬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계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요한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은 인간의 결핍과 부족함, 그리고 기쁨이 사라진 현실을 상징합니다. 그런 자리에 임하신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은혜로 채우시고, 하나님의 충만함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영광은 화려함이 아니라, 은혜의 능력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빛납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그 ‘영광’은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대신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가나의 첫 표적에서 드러난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서막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사람을 살리고, 결핍을 채우고, 절망 속에 희망을 심는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도 주님의 영광은 그런 방식으로 임합니다. 환한 조명 아래서가 아니라,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결핍의 자리, 소외된 일상의 한복판에서 주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영광은 우리의 자랑을 낮추고, 주님의 높으심을 드러내며, 예배로 이끕니다.

믿음의 시작: 관계의 전환

요한은 이 표적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서 사용된 ‘믿다’는 단어는 헬라어 ‘피스튜오’(πιστεύω)로, 단순한 인지적 동의나 감정적 호감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예수님께 의탁하는 전인격적 신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끌렸거나, 세례 요한의 소개에 따라 호기심으로 다가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첫 표적을 통해, 그들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감정적 동경을 넘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목적입니다. 요한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요 20:31).

믿음은 표적을 통해 시작될 수 있지만, 표적에만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후 요한복음 4장에서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책망하시기도 했습니다. 표적은 믿음의 문을 열어주는 도구이지,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표적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보았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은혜의 흔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처럼,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따르다가, 어느 날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며, 점점 더 깊은 신뢰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때로는 의심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결국 그분의 영광 앞에 무릎 꿇고 예배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글자 하나, 단어 하나 실수하는 것처럼, 믿음도 자주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실수를 덮고도 남는 은혜입니다. 그 영광을 본 자는 다시는 이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만남이고, 변화이며, 예수님 앞에 내 삶 전체를 내어드리는 헌신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2장 11절은 예수님의 첫 표적을 단순한 기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창조적 선언이었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는 복음의 서막이었습니다.

연회장의 잔치 가운데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은밀하게 역사하셨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표적입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영원의 빛이 스며드는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주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평범한 상황 속에서, 물 같은 우리의 현실을 포도주로 바꾸시며,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본 자에게는 새로운 믿음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표적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표적을 넘어,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기만 한다면, 그분을 믿게 되고, 그 믿음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도 그 영광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