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4 묵상, 어떻게 그런 일이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신앙의 세계에 처음 들어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도 니고데모처럼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4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혼란스러워진 니고데모의 솔직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이 질문은 단지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며,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생명의 길이 얼마나 전혀 다른 방식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율법적 사고의 한계 속에서 나온 질문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가장 철저히 연구하고 실천하던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문자와 율법의 조항에 대해 박식했고, 종교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경건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니고데모조차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니까?” 여기서 ‘늙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geron인데, 단순한 나이 듦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한계와 고정된 삶의 구조를 뜻하기도 합니다. 니고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제 나이도 많고 삶의 궤도도 이미 결정된 사람이 어떻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이 표현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듭남’—헬라어로 gennēthē anōthen, 즉 ‘위로부터 나는 것’—을 육체적인 출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니고데모가 둔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이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율법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오늘날에도 자주 일어납니다. 복음을 들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인간의 경험과 철학을 뛰어넘는 하늘의 개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새 생명에 대한 영적 무지와 혼란

니고데모의 질문은 신학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무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평생 신앙적 틀 안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전 중심, 율법 중심, 민족 중심의 신앙 세계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토대 위에 ‘위로부터 나는 생명’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온 경건의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충격은 때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내가 쌓아온 신앙 연륜, 내가 이룬 도덕적 성취, 내가 경험한 종교적 체험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데 있어 본질적인 조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니고데모의 혼란은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는 교회를 오래 다녔고, 성경도 읽었고, 봉사도 했는데… 그런데도 거듭나야 한다는 건가요?’ 주님의 대답은 ‘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열어주는 새로운 길

니고데모의 질문은 부정이 아니라 열림입니다. 그는 몰랐지만, 그의 질문은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질문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더 듣게 되었고, 결국 그 말씀 앞에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더욱 구체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 부분은 다음 절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신앙의 자세를 배웁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질문하는 태도, 수용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더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고한 자를 향해 침묵하시지만, 질문하는 자에게는 친히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니고데모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불신의 질문이라기보다는, 놀람과 기대의 혼합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성과 경험을 초월한 일을 하신다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 그리고 아직 설명할 수 없지만 믿고 싶은 갈망이 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신앙의 길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어떻게 새롭게 될 수 있을까?’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믿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님, 니고데모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이 들고, 경력이 쌓이고, 신앙의 외형은 갖췄을지라도 여전히 마음속에는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통해 진리의 문을 여십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반드시 갈망하는 자, 물으며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다시 서서, 나의 신앙이 머리의 지식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성령의 생명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니고데모는 혼란 속에서도 질문했고, 그 질문은 결국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진실하게 묻고, 말씀 앞에 겸손히 서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참된 거듭남의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릴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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