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9 베데스다 연못 38년된 병자 치유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9절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육체 치유의 기적을 넘어서, 영적 무기력과 그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참된 생명의 회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한 정보 확인이 아니라, 병자의 내면을 꿰뚫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믿음 없는 형식주의와 의존적 종교 생활에서 벗어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사건은 구속사 속에서, 메시아 되신 예수께서 율법의 무능을 넘어 참된 안식과 회복을 가져오셨음을 드러냅니다.
병자들의 자리, 은혜가 필요한 자리
본문은 유대인의 명절 후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으로 시작됩니다(요 5:1). 유대인의 명절은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절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은 베데스다라 불리는 연못입니다.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을 뜻하지만, 그 이름과는 달리 그곳은 자비보다는 경쟁과 절망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연못을 “다섯 행각이 있는 곳”이라 기록합니다(요 5:2). 이는 유대 율법의 다섯 책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으며, 율법 아래 놓인 인간의 무력함을 암시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 행각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고 기록합니다(요 5:3). 이들은 모두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자들, 즉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간헐적으로 움직인다는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자가 고침을 받는다는 전승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언제 올지 모르는 기적에 자기 힘으로 먼저 다가가야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자격, 순서, 능력에 따라 얻는 구조.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그런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병자의 반응
예수님은 그 중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먼저 다가가십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이 질문은 단순한 의학적 상담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이 사람의 의지를 깨우는, 동시에 그 내면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영적 거울입니다. ‘낫고자 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은 병의 원인이나 형편이 아니라, 병자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병자의 대답은 다소 안타깝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변명하듯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반응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는 어떤 회복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대답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창조의 명령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일어나’는 ‘ἐγείρου’(egeirou)로, 부활을 의미하는 ‘egeirō’의 명령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기력과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라는 부르심이며, 육체적 회복을 넘어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선언입니다.
병자는 이 말씀에 반응하여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9). 그의 회복은 점진적 변화가 아닙니다. 즉시, 완전한 치유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단지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능력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그 자리는 단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무기력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기대어 살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일어나, 새로운 삶의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안식일,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
본문은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한 구절을 덧붙입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 5:9). 이 짧은 문장은 이후 요한복음 전체에서 전개될 갈등의 서막을 알립니다. 유대인들은 이 치유 사건보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간 병자의 행위에 더 집중합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의 형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보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과 하나님의 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신명기에서는 안식일이 '종 되었던 과거에서의 해방'(신 5:15)을 기념하는 날로 소개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본질은 쉼과 해방, 회복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껍데기만 붙잡고, 그 안에 임하신 참된 안식의 주인을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안식일의 본질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참된 안식은 율법의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임합니다. 병자는 그 날 회복되었고, 자신을 얽매던 육체의 고통과 종교적 무기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안식이며,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이제는 율법이 아닌 은혜로, 기다림이 아닌 믿음으로, 형식이 아닌 인격적 만남으로 회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율법의 행각이 아니라, 생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결론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9절까지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의 이야기지만, 그 이면에는 율법의 무능함과 인간의 무기력, 그리고 은혜로 오신 예수님의 권세가 선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병자는 물이 아닌 말씀으로, 기다림이 아닌 순종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의 질문 앞에 핑계를 대기보다, 그 부르심 앞에 믿음으로 반응한 자는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분의 말씀은 오늘도 능력이 있으며, 순종하는 자를 일으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과거의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