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0-18 안식일 논쟁
안식일 논쟁, 진리 앞에 드러난 얼굴들
요한복음 5장 10절부터 18절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행위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유대 지도자들과의 충돌로 이어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율법 해석의 논쟁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율법을 완성하시는 주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우리가 얼마나 형식에 매여 있고, 그 형식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거울입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을 죽이려는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이 대조는 복음이 가져오는 빛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참모습을 보여줍니다.
자리를 든 자와 자리를 문제 삼는 자들
병자가 고침을 받은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요 5:9). 그리고 이어지는 10절에서 유대인들이 병자에게 말합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옳지 않다’는 말은 헬라어로 ‘οὐκ ἔξεστιν’(ouk exestin)인데, 이는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단순히 병자의 행동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율법적 기준에서 죄로 간주한 것입니다.
하지만 병자는 자신이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자리를 들고 걸었다고 말합니다(요 5:11). 그는 자신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으며,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 모습은 은혜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육적인 삶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유대인들은 고침받은 병자를 축복하거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리를 들었다’는 행위만 문제 삼았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정신은 잊고, 문자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쉼과 회복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 날에 이뤄진 생명의 회복을 죄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들의 신학을 정면으로 무너뜨렸고,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했고, 분노했습니다.
성전에서 다시 마주한 은혜
예수님은 이후 그 병자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 여기서 ‘보라’는 헬라어로 ‘ἴδε’(ide)로, 감탄과 명령을 동시에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의 회복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과 삶의 방향을 다루십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히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외쳤던 회개의 촉구이며, 동시에 예수님이 가져오신 구원의 길로의 초대입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병자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고친 분이 예수님임을 알고 유대인들에게 알립니다(요 5:15). 하지만 그의 알림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 고백이 아니라, 또 다른 회피로 보입니다. 그는 여전히 율법적 체계 안에서 안전한 위치를 찾으려 했고, 예수님은 점점 유대인들의 타깃이 되어 갑니다.
이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경험한 자의 태도에 대해 묻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 구세주로 고백하는가? 아니면 단지 나의 문제 해결자, 상황의 변화만을 위한 존재로 여기는가? 병자의 회복은 시작이었지만, 진정한 회복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보고 믿는 데서 완성됩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심을 인한 충돌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16절부터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박해한다는 이 표현은 헬라어로 ‘ἐδίωκον’(ediōkon)으로, 단순한 비난이나 반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격하고 제거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단어입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의로움을 세우려 했던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이 말씀은 안식일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를 바로잡는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확히 밝히신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 쉬셨지만, 그분의 섭리와 구속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여전히 생명을 돌보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사역을 정당화하는 차원을 넘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이 말씀에서 ‘동등으로 삼다’는 헬라어 ‘ἴσον ποιεῖν’(ison poiein)으로, 질적인 본질의 동등함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한 오해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이해했고, 그 말씀이 신성모독으로 들렸기에 분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이제 논쟁의 중심이 되며, 요한복음의 흐름은 점점 십자가를 향해 나아갑니다.
결론
요한복음 5장 10절부터 18절은 단지 율법의 날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과 그분의 사역이 인간의 종교적 체계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드러난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회복된 병자를 보고 기뻐하기보다 자리를 들었다는 형식을 문제 삼았고, 그를 고치신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구속의 주이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율법의 형식을 넘어,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고백 위에 참된 회복과 구원이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