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1-15 오병이어, 하늘의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떡을 주시는 예수, 왕 되심을 거절하신 예수
요한복음 6장 1절부터 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 기적을 중심으로 한 말씀입니다. 이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만큼 중요하고도 중심적인 사건입니다. 요한은 이 사건을 단순한 기적의 묘사로 끝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예수님의 정체성과 메시야로서의 사역,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떡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은 백성의 피상적인 기대를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행하신 기적 (6:1-4)
1절은 지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시작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라는 말은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구체적인 지명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디베랴는 로마식 이름이고, 갈릴리 바다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요한은 이 두 표현을 함께 사용하여 당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2절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표적"(σημεῖον, sēmeion)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적 사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단지 기이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 임재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 표적이 가리키는 분에게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 유익, 당장의 도움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3절에서 예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고 나옵니다. 이는 말씀을 가르치는 전형적인 모습이며, 이어질 사건이 단지 배고픔을 채우는 기적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는 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4절은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언급합니다. 유월절은 구속과 자유를 상징하는 절기이며, 본문의 사건이 단지 기적이 아니라 출애굽의 모티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께서 주시는 떡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새로운 출애굽의 서막을 알리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시험하시는 예수, 준비하시는 예수 (6:5-9)
5절에서 예수님은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는 질문은 정보 탐색이 아니라 시험입니다. 6절은 명확히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을 모르셔서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또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기기 위해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빌립은 계산을 시작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을 경제적 계산으로만 이해하고, 인간적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답변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빌립의 신중함이나 절제가 아니라, 신앙의 시야 부족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인간의 계산은 언제나 무기력해집니다.
그때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작은 것이 자신에게 맡겨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누구의 손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떡을 나누시고 흩어지기를 거절하신 예수 (6:10-15)
10절에서 예수께서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 잔디가 많으니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는 구절은 10편 23편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푸른 초장에서 양 무리처럼 앉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께서 목자 되심으로써 양떼를 먹이시는 장면이 겹쳐집니다. 예수님은 백성의 배를 채우시는 목자이시며,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참된 떡이십니다.
11절에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나눠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성찬의 예표로 자주 연결되며,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사역을 상징합니다. 떡을 축사하시고 나누시는 행위는 예수님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에게 주실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린 작은 떡은, 하나님의 축사를 통해 모두에게 넉넉하게 나눠질 수 있는 은혜의 자원이 됩니다.
12절에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후,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게 하십니다. 그 수가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량의 의미를 넘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충분히 공급되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넉넉하며, 남습니다. 또한 남은 조각을 버리지 않고 모으게 하신 주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자원에 대한 청지기적 태도도 함께 가르치십니다.
13절까지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필요를 채우시는 기적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기적 뒤에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14절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이르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이 말은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기대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지자를 단지 정치적 해방자로, 현실적 해결사로 오해했습니다.
15절은 예수님의 결정적인 행동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사람들은 배불리 먹은 후에, 예수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만족을 위한 왕이었지, 죄와 죽음에서 건지시는 구속자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거절하시고, 산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왕 되심이 십자가 없는 영광의 왕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분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왕이시며, 그 길을 위해 홀로 조용히 나아가십니다.
결론
요한복음 6:1-15은 기적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 기적 안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그분을 둘러싼 오해와 거절의 이야기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에게 떡을 주셨지만, 자신을 떡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떡을 받되, 그 떡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억지로 자기 기대에 맞추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영광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날 것이며, 그 떡은 자기 몸을 찢어 우리에게 주시는 희생의 떡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이 많습니다. 물질의 축복, 건강, 형통한 삶을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떡을 원하느냐, 아니면 떡이신 나를 원하느냐?"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배불리시는 분이지만, 더 나아가 영생을 주시는 참된 떡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르며,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