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21-30 강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하리라

 

십자가의 영광 앞에서 드러난 정체성의 빛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8:21-30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은 단지 논쟁이나 오해의 차원을 넘어서,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인류의 실존을 흔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점점 선명해지고, 듣는 자들의 심령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인간의 죄성, 그리고 구원의 초청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묵상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죄 된 본성과 무지를 깨닫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극진하고 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냉정하면서도 사랑이 가득하며, 진리이면서도 초청입니다.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경고는 예수님을 통한 생명으로의 길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단지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하리라 (21-22절)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가리니"(ὑπάγω)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한 영광스러운 귀환을 내포하는 언어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고난과 죽음을 지나 부활과 승천으로 향하며, 그것은 인류를 위한 중보적 사역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나를 찾다가"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유대인들의 열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기준과 기대 속에서 메시아를 찾았기에,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오해는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영적인 소경(요 9장)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비롯된 무지이며, 예수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살하려 하나?"라고 반응한 것은, 당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자살이 가장 저주받은 죽음 중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와 구속사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무지는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겉으로는 신앙적 언어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위에서 온 자와 아래에 속한 자 (23-24절)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위에서"(ἄνωθεν)와 "아래에서"(κάτω)는 공간적 차이만이 아니라 본질적 기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땅에 거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반대로 인간은 창조된 피조물로서, 타락 이후 죄 가운데에 놓인 존재입니다.

이 대조는 매우 뚜렷하며, 복음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적 진술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오직 위에서 내려오신 분이 그들을 끌어올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반복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구속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절대적 선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믿다"(πιστεύητε)는 단어는 단순한 이성적 동의나 감정적 수긍이 아닌, 인격 전체로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전폭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삶의 주권을 예수님께 드리고, 그분의 말씀과 인격에 복종하는 삶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이 표현은 단순한 자기 소개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헬라어로 "ἐγώ εἰμι",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신적 자기 선언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적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암시하며,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 진리 앞에 무릎 꿇도록 요구하는 신적 선언입니다.

내가 그인 줄 알리라 (25-30절)

유대인들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냐?" 이는 단순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여전히 믿지 않으려는 완강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침착하게, 그러나 권위 있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이는 그분이 말씀으로 계셨고(요 1:1), 세상에 오셨으며, 처음부터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역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하며,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선포자일 뿐 아니라, 그 말씀 자체이십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단지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아니라, 메시지의 주체이자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28절은 이 본문의 클라이맥스입니다.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리라." 여기서 "든다"는 표현은 헬라어 "ὑψόω"인데, 이는 단순히 높이 든다는 의미를 넘어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더불어 영광을 받는다는 뜻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의 정체성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세상은 그분을 거부하고 죽이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셨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이 완전한 순종은 곧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그분의 고난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고, 그분의 낮아지심이 우리의 높아짐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문맥을 보면, 이 믿음이 언제나 진정한 회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그 믿음이 진짜인지 여부는 삶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순종과 변화된 삶으로 이어집니다.

결론

요한복음 8:21-30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동시에, 듣는 자들의 정체성 또한 드러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빛 앞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위에서 난 자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아래에 속해 있습니까?

그분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그 음성 앞에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높이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이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다시금 우리의 정체성과 믿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 앞에 정직하게 응답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믿고 따를 것인가. 예수님의 정체성이 선명해질수록, 우리의 정체성도 함께 선명해집니다.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자신을 비추고, 오직 위로부터 난 믿음을 붙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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