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12 강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회복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회복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매우 상징적이고도 실제적인 기적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이 사건은 단순한 치유의 이야기가 아니라,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이며, 믿음과 불신, 영적 시력과 영적 소경에 관한 깊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1절부터 12절까지는 서론적 사건 전개이자, 신학적으로 중요한 복음의 표징이 담긴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죄와 고난의 문제, 하나님의 일의 목적, 예수님의 권세와 우리의 응답에 대해 살펴보게 됩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목적 (9:1-3)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절) 이 짧은 표현 안에는 놀라운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보셨습니다. '보다'는 헬라어로 "εἶδεν"인데, 이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주목하고, 주도적으로 관심을 두시는 동작입니다. 즉, 맹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맹인을 먼저 찾아보신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주도권이 철저히 하나님의 편에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묻습니다. “라삐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만연했던 보상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즉, 병이나 장애는 곧 죄의 결과이며,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죄를 지었을 가능성까지 고려하는 이 사고는, 인간 중심의 원인-결과 체계에 사로잡힌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을 주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여기서 '나타내다'는 말은 헬라어로 "φανερωθῇ", 이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곧 이 사람의 장애는 심판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통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고난과 약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완전히 전환시킵니다. 때로 하나님은 연약함 가운데서 오히려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며, 회복입니다.
낮과 밤, 보내신 이의 일을 하라 (9:4-5)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사역의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 여기서 '낮'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역사하는 시간, 즉 예수님의 공생애와 복음이 선포되는 은혜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밤'은 심판과 기회의 종결, 혹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의 어두움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를 보내신 이”라고 부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자임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역은 단순한 선행이나 병고침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구속 사역입니다. 본문에서 ‘일’(ἔργα)은 단지 노동이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그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신지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빛’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헬라어 "φῶς"는 어둠을 몰아내는 생명의 근원이며, 진리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물리적 시력을 회복시키는 분이 아니라, 영적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을 생명의 빛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바로 그 상징입니다. 그는 눈을 뜨는 동시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점차 알아가는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치유의 방식, 순종의 걸음 (9:6-12)
예수님은 그 맹인을 고치시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6절). 이 행동은 현대적 기준으로는 다소 낯설고 불결하게 보일 수 있지만, 유대 사회에서는 침과 진흙이 치료적인 힘이 있다고 여겨지던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치료의 방식보다, 치료를 명하시는 이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창조를 연상케 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예수님은 흙을 통해 맹인의 눈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이는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절)고 명하십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ἀπεσταλμένος)는 뜻인데,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는 간접적인 표지입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보내심 받은 이로서, 실로암이라는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상징이 됩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고, 보게 됩니다. 그의 회복은 순종을 통한 회복이며, 믿음을 통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의 눈이 열린 뒤,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이웃들과 그의 모습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며 묻습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8절) 어떤 이들은 그가 맞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닮았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그니라.”(9절) 여기서 '내가 그니라'(ἐγώ εἰμι)는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선언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이 아니지만, 이제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그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생생한 간증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묻고, 그는 담대히 간증합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절) 여기서 핵심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ὁ Ἰησοῦς)은 그에게는 아직 신학적으로 온전한 이해는 없지만, 분명한 경험과 순종의 결과로서 회복을 경험하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만족하지 않고 다시 묻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 그는 “알지 못하노라”(12절)고 대답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 이어지는 긴 논쟁과 믿음의 고백, 영적 시력의 회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론
요한복음 9:1-12은 단지 육체적인 병고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영적 빛과 구속의 역사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셨고, 그 일은 은혜로 주어졌으며, 순종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졌던 인간 중심의 원인론적 질문은,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를 보시며 다가오십니다. 스스로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향해 먼저 다가가시고, 말씀하시고,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빛과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맹인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 단순히 순종하며 나아갈 때, 새로운 시야와 새 생명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씻으라.” 그 음성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실로암, 곧 보내심 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빛을 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