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35-41 강해, 우리도 맹인인가?
참된 믿음의 고백과 영적 시력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뜨는 사건에서 시작하여,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영적 각성과 신앙 고백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가 바리새인들의 압박 속에서 예수님을 향한 점진적인 인식을 쌓아가며 결국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기까지의 여정은,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자라며 결단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서사입니다. 본문 35절부터 41절은 이 믿음의 완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반대로 영적 시력을 자처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두움에 속해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주를 다시 만난 맹인의 믿음 (9:35-38)
바리새인들로부터 쫓겨난 맹인은 세상의 종교 체계 속에서 거절당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3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여기서 ‘쫓아냈다’는 헬라어 “ἐξέβαλον”은 단순한 내쫓음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배제하는 강제적인 추방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돌보지 않던 이 사람을 예수님은 친히 찾아오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항상 연약한 자, 버림받은 자를 먼저 찾아가시는 구원의 주도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그분의 신성과 메시아 됨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단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니엘 7장 13절에 나타난 하나님 보좌 우편의 권세자, 종말론적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그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에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36절).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더 깊은 인식 가운데 있습니다.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삶을 다해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준비된 자세입니다. 이 고백은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 여기서 ‘보다’는 헬라어 ‘ἑώρακας’는 단순한 시각적 인식이 아니라, 깊이 있는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제 단지 물리적 시력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절). 이 절하는 행위는 헬라어 ‘προσεκύνησεν’인데, 이는 단순한 존경이 아니라, 경배의 행위로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이제 완전히 성숙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심판으로 오신 예수님의 선언 (9:39)
예수님은 이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후, 39절에서 중요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심판으로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심판’(κρίμα)은 궁극적인 형벌의 개념 이전에, 분별과 드러냄의 기능을 포함한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중 하나는 진리와 거짓, 믿음과 불신, 빛과 어둠을 분명히 갈라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의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빛과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반면 ‘보는 자들’은 자기 의에 가득 차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안다고 여기는 자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밝다고 여기나 실제로는 어둠 가운데 있고, 그 어둠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이 믿음의 출발이라는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만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의 마지막 논쟁 (9:40-41)
예수님의 말씀을 곁에서 들은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반응합니다. “우리도 맹인인가?”(40절) 이 질문은 단지 확인의 의미가 아니라, 반발과 조롱이 섞인 질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의 해석자로서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 이 말씀은 굉장히 심오한 선언입니다. ‘맹인이 되었더라면’이라는 표현은 자신이 보지 못함을 인정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런 자는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다고 하니’—즉 스스로 안다고 여기며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죄가 그대로 있다’(ἡ ἁμαρτία ὑμῶν μένει)는 말은 단순한 윤리적 잘못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지만, 그 빛을 거부한 자는 자기 죄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고도 거부한 자에게는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바리새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말씀 앞에 엎드리지 않고, 자기 의와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 또한 영적 맹인일 수 있습니다.
결론
요한복음 9:35-41은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자의 믿음이 어떻게 성숙하며,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온전한 고백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종교적 자만에 빠진 자들이 어떻게 참된 진리를 거부하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본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의 눈을 열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 질문은 단지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전 존재를 걸고 따를 준비가 되었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우리는 참된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자기 의와 종교적 확신 속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더욱 어두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 그분의 인도를 구하는 자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버려진 자를 다시 부르시고, 거절당한 자에게 손 내미십니다. 그 음성에 응답하는 자만이 참된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되고, 보는 자는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주님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참된 믿음의 길을 오늘도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