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45-57 강해, 예수님을 죽일 음모

 

죽이려는 음모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

요한복음 11장 45절에서 57절은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기적 이후에 벌어지는 충격적인 반응과 그로 인해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사역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기적은 항상 믿음만을 낳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회심하고, 어떤 이는 그 기적을 제거의 이유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반응의 중심에서 하나님은 놀랍도록 정교한 섭리로 구속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그리고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함께 묵상하게 됩니다.

나사로 사건 이후의 양극화된 반응

45절은 기적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단지 육체적 소생만이 아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표적을 통해 주어진 것이지만, 요한복음은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지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인식하고 그분을 따르는 헌신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46절은 대조적으로, 어떤 자들은 이 일을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알립니다. 단순한 소문 전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제거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섞인 반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세상의 양극화된 반응을 보게 됩니다. 기적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정죄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 긴장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복음은 평안과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세상의 대립을 낳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분열을 예상하셨고,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이 모두를 믿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기적 이후 드러나는 반응이 그 사람의 참된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감추어진 음모의 모순

47절부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이 말하길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여기서 그들의 걱정은 단지 종교적 경계선의 무너짐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정성과 로마의 압박을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민중의 열광이 자칫하면 로마의 진압을 불러올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 속에는 놀라운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들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온 민족이 구원받는 일이 벌어집니다. 카야바는 4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말했지만, 요한은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예언한 말이며, 예수님이 유대 민족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51-52절).

이는 하나님의 섭리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의 말과 결정조차도 자신의 구속사적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십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바로 이 지점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그 모든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쓰입니다. 카야바는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지만, 그 계획이 곧 하나님의 대속 계획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악함보다 크며, 세상의 어떤 방해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신과 십자가를 향한 준비

53절은 이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이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끝을 알리는 선언과 같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유대인 가운데 다니지 않으시고, 에브라임이라는 빈 들 가까운 곳으로 물러나십니다(54절).

이는 피신이나 도피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섭리적 후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스스로 정하십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해도, 그분의 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만 도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길을 인간의 압력이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순종 가운데 걸어가십니다.

55절부터 57절까지는 유월절을 앞두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명령을 내려,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향한 압박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 모든 음모와 추적, 불안과 긴장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단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마땅히 죽으셔야 할 그 자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니다.

결론

요한복음 11:45-57은 복음의 놀라운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생명을 주는 기적은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촉진시키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자들의 계략은 오히려 온 세상을 위한 대속의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함까지도 도구로 삼아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때로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듯 보이는 현실 앞에 절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였고, 예수님의 죽음은 결국 우리의 생명을 예비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반응과 음모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담대한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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