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주해적 묵상
로마서 1장 주해적 묵상
: 복음의 서두에서 죄와 구원의 지평까지
1. 로마서 1장의 신학적 위치와 역할: 서신의 문을 여는 복음의 논제
로마서 1장은 단순한 인사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 장은 로마서 전체의 논증을 여는 서두이자, 복음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그리고 그 복음이 어떤 세계를 향해 선포되는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신학적 전초기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실제로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심판하고 어떻게 새롭게 하는지를 “계시”하려 합니다. 그래서 1장은 곧장 복음의 정체(1:1-7), 복음의 사명과 교회의 위치(1:8-15), 복음의 주제문(1:16-17), 그리고 그 복음이 왜 절박한지에 대한 진단(1:18-32)으로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1장은 “복음의 빛”과 “죄의 어둠”을 가장 먼저 마주 보게 하여, 이후 2–3장에서 펼쳐질 보편적 죄 아래의 인류 진단으로 독자를 밀어 넣습니다. 이 구조는 목회적입니다. 바울은 논쟁을 즐기기 위해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δύναμις)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먼저 보여 줍니다.
2. 바울의 자기 이해와 교회의 정체: 종(δοῦλος)과 부르심(κλητός)으로 시작되는 공동체
2.1 종(δοῦλος)과 사도(ἀπόστολος): 복음은 바울의 사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δοῦλος)이라 부르며 서신을 엽니다. 종이라는 말은 단순한 겸손의 수사가 아니라, 소속의 언어입니다. 바울의 삶과 말과 사역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그 소속은 의무 이전에 구속의 은혜에서 비롯됩니다. 이어서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κλητός)을 받은 자, 복음을 위하여 구별된(ἀφορίζω) 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르심(κλητός)”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넘어, 구속사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 자신의 일을 맡기시는 언약적 호출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별됨(ἀφορίζω)”은 자신을 세상에서 분리해 성벽 안으로 숨는 태도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세상 한복판으로 파송되는 분별입니다. 복음은 바울이 만든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이며, 바울은 그 복음에 붙들린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2.2 거룩(ἅγιος)과 은혜(χάρις): 로마 교회는 성취가 아니라 부르심으로 존재합니다
바울은 받는 이들을 “부르심을 받은 자들(κλητοί)”이라 하고, “성도(ἅγιοι)”라 부릅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의 도덕적 완성도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새 백성으로 불러 세우셨다는 정체성 선언입니다. 거룩함(ἅγιος)은 먼저 지위이며, 그 지위에서 삶이 흘러나옵니다. 또한 바울은 은혜(χάρις)와 평강(εἰρήνη)을 선언합니다. 평강은 단지 마음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는 화목의 결과입니다. 이 첫 인사말만으로도 로마서의 구원론과 교회론이 예고됩니다. 교회는 스스로 도달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출과 은혜의 사건으로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3. 복음의 내용: 약속에서 성취로, 다윗의 씨와 부활 사이에 선 그리스도
바울은 복음을 구약의 약속과 분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복음은 새로움이되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πιστός) 분이시며, 약속을 성취하시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끄십니다. 그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바울은 이 아들을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말하여 메시아적 성취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결의 영(πνεῦμα ἁγιωσύνης)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라고 말하여, 그리스도의 정체가 부활 사건을 통해 공적으로 확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신학의 중요한 연결을 봅니다. 구약의 다윗 언약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고, 종말의 표지인 부활이 이미 역사 속에 침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개인 구원의 확증이 아니라, 새 창조의 시작이며 종말의 첫 열매입니다. 로마서 1장의 그리스도론은 곧 로마서 8장의 새 창조와 영화의 소망으로 이어질 씨앗을 심습니다.
4. 복음의 주제문: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와 믿음(πίστις)의 길
4.1 복음의 능력(δύναμις)과 구원(σωτηρία):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로마 제국의 중심에서 십자가에 달린 유대인의 메시지가 조롱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δύναμις)입니다. 그 능력은 사람의 의지를 고양하는 에너지라기보다, 죄와 사망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구원(σωτηρία)을 실제로 일으키는 하나님의 작정이 역사 속에 작동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유대인에게 먼저요 헬라인에게도 미칩니다. 이것은 특권의 서열을 세우려는 말이 아니라, 구속사의 순서를 말합니다. 약속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그 성취가 이방에게까지 흘러갑니다. 이 흐름은 9–11장에서 다시 거대한 구속사적 논의로 확대됩니다.
4.2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와 계시(ἀποκαλύπτεται): 믿음에서 믿음으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가 나타난다(ἀποκαλύπτεται)”는 말은 로마서 전체를 지배하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단지 하나님이 공정하다는 도덕적 속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며,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시는 구원 행위로 드러나는 의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믿음(πίστις)으로 받습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시작도 끝도 믿음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믿음이 믿음을 낳는 복음의 역동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박국의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소환하여, 구약의 신앙이 이미 이 길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성경신학적으로 복음은 구약과 신약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결같이 믿음으로 자기 백성을 살리신다는 구속사의 일관성입니다.
5. 하나님의 진노(ὀργή)의 계시: 죄의 본질은 윤리의 실패가 아니라 예배의 전도입니다
5.1 진노(ὀργή)가 “나타난다(ἀποκαλύπτεται)”: 현재 속에 스며든 종말의 그림자
바울은 1:18에서 놀라운 대칭을 만듭니다. 1:17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ἀποκαλύπτεται)”고 했는데, 1:18에서도 하나님의 진노(ὀργή)가 “나타난다(ἀποκαλύπτεται)”고 말합니다. 즉 복음의 빛과 심판의 그림자가 동시에 계시됩니다. 진노는 단지 미래 어느 날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죄로 드러내시는 현재적 심판의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입니다. 최종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그 심판의 성격이 지금도 인간의 삶과 사회 속에서 미리 맛보여집니다. 바울은 이 긴장을 통해, 복음이 단지 “사후 구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을 새 질서로 옮기는 하나님의 통치임을 말합니다.
5.2 알면서도 억누르는 진리: 창조 계시와 책임의 보편성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몰라서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 만한 것(τὸ γνωστὸν τοῦ θεοῦ)이 그들 속에 나타나 있다”고 말합니다. 창조 세계(κτίσις)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여”(νοούμενα καθορᾶται)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창조 계시의 선물을 말하지만, 동시에 그 선물이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불의로 진리를 막는”(κατεχόντων) 태도입니다. 진리를 붙잡아야 할 손으로 진리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성경신학적으로 이것은 아담의 타락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배하는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피조물을 향해 마음을 굽힙니다.
5.3 바꾸어 버림의 신학: 영광의 교환과 거짓 예배
바울은 반복적으로 “바꾸었다”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의 형상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자연적 관계를 반자연적 관계로 바꿉니다. 죄의 핵심은 바른 것을 다른 것으로 “교환”하는 왜곡입니다. 여기서 죄는 윤리 문제이기 전에 예배 문제입니다. 바울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다(λατρεύω)”고 말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배하는 존재이며, 예배의 방향이 뒤집히면 삶의 모든 질서가 무너집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너희 몸을 산 제사(θυσία)로 드리라”는 권면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장에서 예배가 뒤집힌 인간을 보여 주고, 12장에서 복음이 회복시키는 예배를 제시합니다. 구원은 삶의 일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중심을 되돌리는 일입니다.
6. “내버려 두심(παρέδωκεν)”과 죄의 확장: 심판은 종종 방임의 형태로 임합니다
로마서 1:24, 26, 28에는 세 번의 무거운 동사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παρέδωκεν)”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관심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심판의 방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한 길의 열매를 스스로 맛보게 하심으로 죄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욕심(ἐπιθυμία)이 몸을 욕되게 하고, 부끄러운 정욕(πάθη ἀτιμίας)이 관계를 왜곡시키고, 상실된 분별은 “그럴 듯해 보이는 악”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바울이 특히 성적 타락의 사례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 문제가 다른 죄보다 더 크기 때문이라기보다, 예배의 전도가 인간의 몸과 관계라는 가장 구체적 자리에서 얼마나 깊이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창조주를 떠난 인간은 결국 창조 질서 자체를 해석할 기준을 잃어버립니다.
바울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매(οὐκ ἐδοκίμασαν)” 하나님이 “그 상실한 마음(ἀδόκιμος νοῦς)”에 내버려 두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νοῦς)은 단지 생각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입니다. 그 결과 1:29-31의 악덕 목록이 이어지는데, 이는 개인의 도덕 실패를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예배의 전도가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 주는 사회적 초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죄의 가장 차가운 형태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δικαίωμα)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자들을 “옳다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개인적 행위에서 끝나지 않고, 문화와 분위기와 합의로 굳어져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이 지점에서 로마서 1장은 이미 교회론적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어떤 문화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 복음은 단지 개인의 심령을 위로하는 말씀이 아니라, 거짓의 합의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7. 교회론·구원론·종말론적 연결: 로마서 1장이 여는 큰 지평
로마서 1장의 교회론은 “부르심(κλητός)”과 “거룩함(ἅγιος)”의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로마 교회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작은 공동체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복음이 그들을 어떤 백성으로 빚어 왔는지 확인시킵니다. 교회는 세상의 한 부분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증언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구원론적으로 로마서 1장은 구원을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라는 큰 틀에서 보게 합니다. 복음은 죄책감의 완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는 현실 속에서 죄와 사망의 통치를 끊어 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종말론적으로는, 의(δικαιοσύνη)와 진노(ὀργή)가 모두 “계시된다(ἀποκαλύπτεται)”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종말은 단지 미래 사건이 아니라, 이미 현재 속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두 계시 사이에서 삽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음을 선포하고, 심판의 현실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삶이 어떻게 붕괴하는지 보여 줍니다. 이 둘은 서로를 강화합니다. 죄의 어둠을 직면할수록 복음의 빛이 더 선명해지고, 복음의 빛을 알수록 죄의 어둠이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8. 바울의 목회적·구속사적 의도: 죄를 말함으로 은혜를 작게 만들지 않으려는 사랑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죄의 모습을 거칠게 드러내는 이유는 사람을 절망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복음을 작게 만들지 않기 위해 죄를 작게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가볍게 말하면 은혜는 장식품이 됩니다. 그러나 죄가 예배의 전도이며 창조 질서의 붕괴라면, 구원은 단순한 종교 처방이 아니라 창조주께로의 귀환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공동체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1장에서 “이방의 죄”를 드러낸 뒤, 2장에서 “판단하는 유대인의 죄”를 드러내고, 3장에서 “모든 사람의 죄”로 결론을 냅니다. 이 흐름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를 동일한 자리로 부르는 방식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누구도 우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복음은 언제나 교회를 향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개인을 구원할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한 주님 아래 한 백성이 되게 합니다.
9. 묵상적 결론: 복음은 예배를 되돌리고, 삶의 방향을 다시 창조합니다
로마서 1장은 우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단지 규범을 어기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를 떠나 피조물을 의지하며 살도록 마음이 휘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는 종종 우리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배의 중심이 이동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를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에 의미를 걸어 감사의 자리를 맡깁니다. 그리고 그 대체물은 결국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욕망의 종으로 묶어 둡니다.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은 바로 이 자리에 들어옵니다. 복음은 “착하게 살아라”는 새로운 규칙을 주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다”는 새로운 현실을 선포합니다. 그 현실은 우리의 예배를 되돌립니다. 창조주께로 돌아가는 예배는 곧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 됩니다. 믿음(πίστις)은 단지 머리의 동의가 아니라, 진리를 억누르던 손을 펴서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우리를 새 백성으로 부르시고(κλητός), 거룩한 자리로 옮기시며(ἅγιος), 은혜로 살게 하십니다(χάρις). 로마서 1장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한 가지 사실 앞에 서게 됩니다. 인간의 이야기는 무너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 다시 세우시는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죄의 폐허 위에 새로운 예배를 세우고, 그 예배 위에 새로운 삶을 건축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