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Palm Sunday)의 성경신학적 의의와 교훈

 

성경적·구속사적 의미, 신학적 해석, 현대적 의의

1. 종려주일의 정의와 위치

종려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메시아적 입성”을 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며, 교회력으로는 부활주일(Easter) 직전의 주일이자 고난주간(Holy Week)의 문을 여는 날이다. “종려(棕櫚)”라는 이름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를 환영한 장면에서 비롯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날을 왕의 도성에 들어오시는 왕이자, 동시에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고난의 종이신 그리스도의 역설(paradox)을 함께 묵상한다. 이 날은 환호와 비극, 승리와 수난, 왕권과 자기비움이 한 장면에 겹쳐지는 날이며, 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세상의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날이다.

2. 성경적 근거: 네 복음서의 ‘입성’ 서사

종려주일 사건은 마태(21장), 마가(11장), 누가(19장), 요한(12장)에 공통적으로 전승된다. 공관복음은 나귀(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의 행보를 ‘예언 성취’와 ‘왕의 표지’를 중심으로 서술하며, 요한복음은 종려나무 가지와 “호산나” 환호를 보다 직접적으로 강조한다. 이 입성은 우연한 군중 이벤트가 아니라,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상징적 행위(symbolic act)’를 수행하신 사건이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메시아, 다윗의 자손), 어떤 왕인지(폭력의 왕이 아닌 평화의 왕), 어떤 길로 통치하는지(십자가의 길)를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공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핵심은 “메시아(Messiah)의 정체가 공개적으로 표명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는 그동안 여러 장면에서 메시아적 열광을 제한하거나(이른바 ‘메시아 비밀’의 양상) 오해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예루살렘 입성에서는 오히려 예언의 상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는 수난과 죽음이 가까운 시점에서, 그 죽음이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구속사적 필연’이며 ‘언약의 성취’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참고 성구: 개역개정, 일부 핵심 구절)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요한복음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 12:15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네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구절들은 종려주일의 신학을 결정적으로 요약한다. 왕이 오시되 “겸손”으로 오며, 구원을 베푸시되 “나귀 새끼”를 타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미 종려주일은 단순한 환영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를 드러내는 신학적 선언이다.

3. ‘호산나’의 의미: 예배 언어와 정치적 기대의 교차

군중이 외친 “호산나(Hosanna)”는 본래 히브리어 어원(호시아나/הוֹשִׁיעָה נָּא, hōšîʿâ-nā)에서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간구의 뜻을 가진다. 이는 단순한 박수갈채가 아니라 구원의 요청이며, 시편 118편의 예배 언어가 절기적 열기 속에서 정치적 기대와 결합된 표현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 제국 아래서 메시아적 해방을 갈망했고, 많은 사람은 “다윗 왕국의 회복”을 민족주의적·정치군사적 방식으로 상상했다. 그 결과 종려주일은 신앙 고백과 오해가 섞인 자리, 참된 메시아 신앙과 왜곡된 메시아 기대가 겹쳐진 자리로 나타난다.

이 지점이 종려주일의 아픔이자 깊이이다. 같은 입으로 “호산나”를 외친 무리 중 일부가 수일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의 분위기에 휩쓸릴 가능성이 복음서 내러티브의 긴장으로 존재한다. 이는 군중심리(crowd psychology)의 변덕을 말하려는 수준을 넘어, “인간이 원하는 구원”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간극을 드러낸다. 인간은 상황을 즉시 바꾸어줄 구원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뿌리째 다루는 구원, 곧 십자가의 구원을 주신다.

4. 구속사적 의미: 예루살렘 입성은 왜 ‘필연’인가

종려주일 사건은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흐름에서 몇 가지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4.1 유월절(Passover) 맥락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유월절 기간과 맞물려 있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피로써 죽음이 넘어가는 사건의 기억이다. 복음서가 예수의 수난을 유월절과 결속시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는 새로운 출애굽(new exodus)의 중심이며, 죄와 사망에서의 해방을 이루는 “대속적 희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종려주일은 곧 “어린양이 성 안으로 들어오는 날”로 읽힐 수 있다. 왕의 입성이면서 동시에 제물의 입장이다. 이 이중성이 구속사적 절정의 문을 연다.

4.2 다윗 언약(Davidic covenant)과 메시아 왕권의 공개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호명되며 왕권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 왕권은 정치적 패권이 아니라 언약적 통치(covenantal kingship)이다. 다윗 언약의 성취는 단순히 옛 영토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실현이다. 종려주일은 “다윗 계열 메시아”의 공적 선언이면서, 동시에 다윗 왕권의 재정의이다. 왕이 오시되 “겸손”으로 오시며, 평화로 통치하는 왕이 오신다.

4.3 성전(Temple)과 왕의 권위: 정결과 심판의 서막

공관복음은 예수의 입성 이후 성전 사건(성전 정화)을 배치한다. 이는 예수가 단지 개인의 내면 종교를 말하는 교사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예배 질서와 성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는 왕이자 선지자임을 보여준다. 구속사적으로 성전은 임재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왜곡될 때 심판의 대상이다. 종려주일의 입성은 성전과 예배의 갱신을 동반하는 왕권의 발현이다.

5. 신학적 의미: ‘나귀를 탄 왕’이 드러내는 그리스도론

종려주일은 그리스도론(Christology)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절기이다. 여기서 핵심은 “왕이시되, 십자가로 왕 되시는 분”이라는 역설이다.

5.1 케노시스(kenosis)와 참된 왕권

예수의 입성은 자기비움(케노시스, kenosis)의 표지로 읽힌다. 왕의 상징은 말(군마)이나 전차가 아니라 나귀 새끼이다. 이는 무력과 과시의 통치가 아니라, 낮아짐과 섬김의 통치임을 드러낸다. 종려주일은 교회가 왕권을 말할 때 폭력적 승리주의(triumphalism)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경고한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세상을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죽음을 깨뜨리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5.2 속죄론(Atonement): 대속(substitution)과 승리(Christus Victor)의 결합

종려주일은 수난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므로 속죄론(at-one-ment, atonement)을 향해 문을 연다. 예수는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적 속죄(substitutionary atonement)의 길을 걷는다. 동시에 그 십자가는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승리(Christus Victor)이기도 하다. 종려주일의 환호가 참되게 완성되는 지점은 군중의 열기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 사건이다.

5.3 종말론(eschatology)과 파루시아(Parousia)의 예표

예루살렘 입성은 종말론적 표징을 가진다. 왕이 오신다는 것은 통치의 도래이며 심판과 구원의 새 국면이다. 종려주일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을 품는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교회는 종려주일을 통해 첫 입성(first advent)과 재림(파루시아, parousia)의 소망을 함께 바라본다. 참된 “호산나”는 오늘의 구원 요청이면서, 최종적 구원 완성을 향한 교회의 탄원이다.

6. 예배·전통적 실천: 종려가지와 행렬의 신학

교회 전통에서 종려주일은 종려가지 축복, 행렬(procession), 수난기 낭독(passion reading) 등과 함께 지켜져 왔다. 이는 단순한 상징놀이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는 신학”이다.

  • 종려가지는 환영의 표지이지만, 동시에 쉽게 시드는 잎처럼 인간의 열정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 행렬은 ‘왕을 맞이하는 백성’이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식이다. 다만 이 행렬은 승리의 과시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동행이어야 한다.

  • 수난기 낭독은 종려주일의 분위기가 고난주간의 깊이로 이어지도록 돕는다. 교회는 환호만 남기지 않고, 복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다.

7. 현대적 의의: 오늘의 교회가 종려주일에서 배울 것

종려주일은 현대 교회와 성도에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신의 불편을 제거해 줄 ‘기능적 구원자’를 원한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구원은 죄의 뿌리를 도려내는 십자가의 길이며, 자기중심성을 죽이는 길이다. 종려주일은 ‘환호의 신앙’에서 ‘십자가의 제자도(discipleship)’로 이동하라고 요청한다.

7.1 승리주의 신앙에 대한 경계

교회가 성장과 영향력만을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 오해할 때가 있다. 종려주일은 왕이 오시되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로, 교회가 권력의 언어를 빌려 자신을 증명하려는 유혹을 경계하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계나 외형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義, righteousness)와 자비(mercy)와 진실(truthfulness)의 실재로 드러난다.

7.2 한국적 맥락: 민족 감정과 복음의 분별

한국 교회는 역사 속에서 민족의 고통과 함께 울고, 독립과 민주화 과정에서 신앙적 양심을 드러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민족 감정이 복음의 중심을 대체할 때 위험이 생긴다. 종려주일의 군중도 “이스라엘의 왕”을 외쳤으나 그 의미를 오해했다. 오늘의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자기 진영의 구호로 소비할 수 있다. 종려주일은 신앙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에서 분별(discernment)을 요청한다. 교회는 어떤 체제나 이념의 하위 기관이 아니라, 복음으로 모든 권세를 상대화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언 공동체이다.

7.3 공적 신앙과 비폭력적 평화

종려주일의 왕은 폭력의 왕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공적 참여(public theology)가 반드시 비폭력적 평화(peacemaking)의 방향을 지녀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사랑하되 증오로 싸우지 않는다. 진리를 말하되 사람을 파괴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종려주일은 교회가 “평화의 왕”을 따른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보여주는 절기이다.

8. 추가 주제: 종려주일과 인간 심리—환호에서 배신으로

종려주일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는지를 보여준다. 감정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감정이 진리를 대신할 때이다. 군중은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등을 돌릴 수 있다. 이는 오늘의 신앙에도 동일하다. 기도 응답이 늦어지고 현실이 즉시 바뀌지 않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원하는 결과를 주지 않는 분”으로 오해하고 멀어질 수 있다. 종려주일은 신앙을 감정이 아니라 언약(covenant) 위에 세우라고 말한다. 신앙은 ‘좋을 때의 환호’만이 아니라 ‘어두울 때의 신실함’이다.

9. 결론: 종려주일은 ‘왕을 맞이하는 날’이자 ‘십자가로 들어가는 문’이다

종려주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맞이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 왕권은 세상의 왕권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의 왕좌는 십자가이다. 그분의 승리는 타인을 쓰러뜨리는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타인을 살리는 승리이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은 교회에게 단순히 “호산나를 외치는 날”이 아니라, “십자가의 왕을 따르겠는가”를 묻는 날이다.

종려주일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은 고난주간을 진지하게 걷는 일이며, 부활의 소망을 값싸게 만들지 않는 일이다. 교회는 종려가지의 환호를 지나, 십자가의 침묵과 부활의 찬양으로 나아간다. 그 길에서 성도는 자신의 욕망이 만든 메시아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참 메시아—겸손한 왕, 고난의 종, 대속의 어린양, 부활의 주—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오늘의 삶을 바꾼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공동체에서, 한국 사회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성도를 파송하는 절기가 종려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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