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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7-18 강해, 양의 문,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선언을 담고 있는 장입니다. 그 중에서도 7절부터 18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라고 하신 이중적인 자기 계시의 중심 구절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양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돌보심, 보호하심, 그리고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의 사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단지 교훈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를 드러내며,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야 하며 어떤 음성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10:7-10)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문’(θύρα)은 단순한 출입구 이상의 상징입니다. 이는 곧 구원의 통로, 참된 보호와 인도의 유일한 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문이라는 선언은, 그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단독적이며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8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역사적 시간 순서보다는, 메시아의 이름으로 혹은 권위를 주장하며 등장한 거짓된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절도’(κλέπτης)는 은밀하게, ‘강도’(λῃστής)는 폭력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앞선 1절에서도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시며, 양들을 진정으로 위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거짓 지도자들을 경고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얻는 구원의 복을 삼중적으로 설명한 말씀입니다. 첫째, 구원받는다는 것은 헬라어 ‘σωθήσεται’(소세세타이)로, 전적인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말...

요한복음 10:1-6 강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선포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후, 바리새인들의 영적 맹목과 참된 믿음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는 연결된 메시지입니다. 이 배경 안에서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참된 영적 지도자와 거짓된 인도자의 구분을 명확히 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6절은 이 비유의 서론부로서, 복음의 길과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에 대한 핵심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10:1)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절) 여기서 반복되는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는 예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와 진정성을 강조하는 수사입니다. 이는 단순히 무게감을 주는 서술이 아니라, 듣는 자로 하여금 이 말씀이 생명과 진리의 핵심임을 주목하게 하는 선언입니다. ‘문’은 헬라어로 “θύρα”이며, 통상적으로 합법적 출입을 뜻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양 떼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αὐλή, 울타리)를 만들고, 그 출입구는 하나였으며 목자만이 그 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담을 넘어 들어오는 자는 도둑이나 강도임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구조를 통해 합법적으로 양 떼에게 접근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절도'(κλέπτης)는 은밀히 훔치는 자, '강도'(λῃστής)는 폭력을 사용하여 빼앗는 자를 의미합니다. 즉, 외형상으로는 양 떼를 돌보는 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양을 이용하고 해를 끼치는 자들입니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한 비판이며, 본질적으로 거짓된 영적 지도자에...

요한복음 9:35-41 강해, 우리도 맹인인가?

  참된 믿음의 고백과 영적 시력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뜨는 사건에서 시작하여,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영적 각성과 신앙 고백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가 바리새인들의 압박 속에서 예수님을 향한 점진적인 인식을 쌓아가며 결국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기까지의 여정은,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자라며 결단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서사입니다. 본문 35절부터 41절은 이 믿음의 완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반대로 영적 시력을 자처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두움에 속해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주를 다시 만난 맹인의 믿음 (9:35-38) 바리새인들로부터 쫓겨난 맹인은 세상의 종교 체계 속에서 거절당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3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여기서 ‘쫓아냈다’는 헬라어 “ἐξέβαλον”은 단순한 내쫓음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배제하는 강제적인 추방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돌보지 않던 이 사람을 예수님은 친히 찾아오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항상 연약한 자, 버림받은 자를 먼저 찾아가시는 구원의 주도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그분의 신성과 메시아 됨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단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니엘 7장 13절에 나타난 하나님 보좌 우편의 권세자, 종말론적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그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에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36절).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더 깊은 인식 ...

요한복음 9:13-34 강해, 진정 눈먼자는 누구인가?

  눈뜬 자와 눈먼 자: 진리를 외면한 종교적 맹목 요한복음 9장 13절부터 34절은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 이후 벌어진 바리새인들과의 긴 논쟁을 다룹니다. 단순한 기적의 결과가 아니라, 그 기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각 인물들의 정체성과 믿음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이 본문은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점점 더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만, 종교적 전통과 교만 속에 갇힌 자들은 점점 더 깊은 어둠에 빠져가는 영적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안식일에 행하신 기적 앞에서 드러난 종교의 본질 (9:13-17) 본문은 치유된 맹인이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13절) 여기서 '데리고 갔다'는 표현은 자발적 진술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재판을 위한 고발처럼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것이 이 논쟁의 중심 갈등이 됩니다(14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게 하신 사건은 단지 의도된 논란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얽매는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폭로하기 위한 주님의 의도적 개입이었습니다. 유대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반죽’하는 행위는 노동으로 간주되었고, 치료 행위 또한 정해진 위급한 경우를 제외하면 금지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 해석의 한계와 왜곡을 치유의 사건을 통해 도전하신 것입니다. 이에 바리새인들 중 일부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다”(16절)고 말하며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여기서 헬라어 "οὐκ ἐστὶν παρὰ τοῦ θεοῦ"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강한 부정문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근원을 부인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죄인이라면 이런 표적을 어떻게 행하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하며, 안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시...

요한복음 9:1-12 강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회복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회복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매우 상징적이고도 실제적인 기적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이 사건은 단순한 치유의 이야기가 아니라,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이며, 믿음과 불신, 영적 시력과 영적 소경에 관한 깊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1절부터 12절까지는 서론적 사건 전개이자, 신학적으로 중요한 복음의 표징이 담긴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죄와 고난의 문제, 하나님의 일의 목적, 예수님의 권세와 우리의 응답에 대해 살펴보게 됩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목적 (9:1-3)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절) 이 짧은 표현 안에는 놀라운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보셨습니다. '보다'는 헬라어로 "εἶδεν"인데, 이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주목하고, 주도적으로 관심을 두시는 동작입니다. 즉, 맹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맹인을 먼저 찾아보신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주도권이 철저히 하나님의 편에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묻습니다. “라삐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만연했던 보상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즉, 병이나 장애는 곧 죄의 결과이며,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죄를 지었을 가능성까지 고려하는 이 사고는, 인간 중심의 원인-결과 체계에 사로잡힌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을 주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여기서 '나타내다'는 말은 헬라어로 "φανερωθ...

요한복음 8:45-51 강해 진리를 말하나 믿지 않는 자들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 논쟁은 단순한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분이 선포하신 진리에 대한 수용과 거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45절부터 51절까지의 본문은 예수님이 진리를 말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믿지 않으려 하는 인간의 근원적 거부와, 그 거부를 극복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나 믿지 않는 자들 (8:45-47)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45절) 여기서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는 "ἀλήθειαν"입니다. 이는 단지 사실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 흘러나온 절대적인 실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역설을 지적하십니다.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 진리 앞에 눈을 감고 귀를 닫습니다. 이어지는 46절에서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말씀에 어떠한 죄도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죄”는 헬라어 "ἁμαρτία"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그러진 모든 상태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리만을 말씀하셨고, 죄의 그림자조차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7절은 이를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단지 소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듣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청각의 문...

요한복음 8:37-44 강해, 거짓의 아비

  거짓의 아비와 진리의 아들들 요한복음 8장은 점점 더 날카로운 영적 논쟁으로 나아갑니다. 31절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대화는 이제 그들의 실체를 예수님께서 낱낱이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육체적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처하였고, 종교적 자부심 속에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진정한 정체성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밝히시며, 참된 자녀됨은 육적 출신이 아니라 영적 일치,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용과 순종임을 선언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그의 행위를 따르는 자인가? (8:37-39)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주장에 대해 일정 부분 인정하시며 출발하십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37절). 여기서 '자손'으로 번역된 헬라어 "σπέρμα"는 씨앗, 즉 육적 혈통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그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을 두지 아니하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즉 그들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본성을 따르지 않으며,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마귀적 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와 사역이 "하나님께 들은 그것을 말하는 것"(38절)이라고 밝히십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함께 가지고 계신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란 선언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그것을 행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이 아님을 이미 전제하고 계시며, 그 아비가 누구인지 본문 후반에서 명확히 드러내십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는 '아브라함'을 단지 조상으...

요한복음 8:31-36 강해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점차 깊어지는 흐름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기 시작한 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제자의 길과 자유의 본질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31절부터 36절까지는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에게 던지신 도전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의 선언입니다.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이 진실된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감정인지 예수님은 정확히 꿰뚫어보십니다. 본문은 진리, 제자됨, 그리고 자유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복음이 어떻게 인간의 본질적인 속박에서 해방시키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참된 제자는 그 말씀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는 말씀은, 겉으로 믿는다고 고백한 자들에게 주신 시험이자 권면입니다. 여기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μείνητε ἐν τῷ λόγῳ τῷ ἐμῷ"인데, "거하다"(μένω)는 단순히 머무는 것을 넘어 지속적인 관계 안에 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붙어 있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구절은 단지 예수님을 감정적으로 믿거나 일시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삶 전체를 그 말씀에 두는 지속적 제자도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는 말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 말씀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말씀을 단지 듣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 안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는 단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지식적으로 성경을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제자도는 존재할 ...

요한복음 8:52-59 강해 아브라함 이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 이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의 신성과 권위를 유대인들 앞에서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내는 말씀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52절부터 59절은 그 논쟁의 절정을 이루는 본문으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이심을 선언하고, 결국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ἐγώ εἰμι)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밝히시는 매우 놀랍고도 결정적인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지 예수님이 위대한 선지자라는 차원을 넘어, 그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장면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게 합니다.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대한 오해 (8:52-53) 예수님께서 앞선 51절에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조롱 섞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52절). 여기서 '죽음을 맛보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γεύσηται θανάτου"인데, '죽음을 체험하다', '직접 경험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보다 크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부심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이미 죽은 아브라함보다 크냐?”(53절) 이 질문은 겉으로는 반문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신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불신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죽음과 생명을 다루고 있지만, 그들은 오직 육신적 차원에서만 이해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인간 이성의 전형적인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진리를 육적인 틀로만 해석하려 할 때, 결국 진리를 오해하고 거부하게 되...

요한복음 8:21-30 강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하리라

  십자가의 영광 앞에서 드러난 정체성의 빛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8:21-30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은 단지 논쟁이나 오해의 차원을 넘어서,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인류의 실존을 흔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점점 선명해지고, 듣는 자들의 심령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인간의 죄성, 그리고 구원의 초청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묵상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죄 된 본성과 무지를 깨닫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극진하고 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냉정하면서도 사랑이 가득하며, 진리이면서도 초청입니다.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경고는 예수님을 통한 생명으로의 길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단지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하리라 (21-22절)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가리니"(ὑπάγω)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한 영광스러운 귀환을 내포하는 언어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고난과 죽음을 지나 부활과 승천으로 향하며, 그것은 인류를 위한 중보적 사역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나를 찾다가"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유대인들의 열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기준과 기대 속에서 메시아를 찾았기에,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오해는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영적인 소경(요 9장)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비롯된 무지이며, 예수님의 존재를 있는 그대...

요한복음 8:12-20 강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세상의 빛이신 예수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신 이 장면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 언어 중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개입이며, 진리를 거부하는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길을 제시하시는 선포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구약에 대한 성취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밝히는 복음의 핵심이 담긴 선언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12절)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을 넘어, 구속사의 언어입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메시야의 정체성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9:2에서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라 했고, 이사야 42:6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빛'(φῶς)은 단지 시각적 밝음이 아니라,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단지 진리를 아는 자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며, 생명 자체라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제자의 개념이며, 단순히 예수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그의 뒤에 두고 순종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은 본문 전체에서 죄와 죽음, 심판의 상태를 뜻하는 '어둠'(σκότος)과 대조됩니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없고, 빛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에만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이 빛은 일시적인 지식이나 감정의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는 진리입니다. ...

요한복음 8:1-11 강해 음행 중에 잡혀온 여자

  죄인을 위한 은혜의 자리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두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시험을 받으시는 이 장면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은혜의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단순한 용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인간의 죄성과 위선을 동시에 드러내는 놀라운 복음의 초상입니다.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파하지 않으시면서도,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을 보여주십니다. 시험하는 자들의 의도와 예수의 침묵 (1-6절) 1절은 예수께서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말하며 시작합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이 자주 기도하시던 곳이자, 종말론적 메시야 사역이 성취될 장소로 상징되는 곳입니다. 2절에서 예수께서는 아침 일찍 다시 성전으로 오셨고, 많은 무리가 모여듭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라는 표현은 라삐의 전통적 가르침 자세를 따르신 것으로, 이는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3절과 4절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 예수 앞에 세웁니다. 헬라어 원문은 'ἐπὶ μοιχείᾳ κατειλημένην'이라 하여 실제로 현장에서 잡힌 상태, 증거가 명백한 경우임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절에서 그들은 시험의 본격적 의도를 드러냅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들은 신명기 22:22 이하의 율법을 근거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예수께서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시면 로마법에 의해 문제가 되며, 반대로 용서하라고 하시면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몰아가려는 것입니다. 6절 상반절은 이들의 속셈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그러나 예수님은 곧장 반응하...

요한복음 7:45-52 강해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편견과 진리의 충돌 요한복음 7장은 초막절이라는 큰 명절 속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사역이 선포되고, 그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장입니다. 그중 45-52절은 특별히 예수를 체포하러 보낸 성전 경비병들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대화를 중심으로, 권력과 종교적 위선, 그리고 진리를 향한 내적 갈등이 드러나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완악함과 진리에 대한 반응의 양극화를 깊이 있게 묵상해 봅니다. 체포되지 못한 예수와 경비병들의 고백 (45-46절) 45절에서 성전 경비병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돌아왔을 때, 지도자들은 묻습니다.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본래 경비병들은 32절에서 예수를 잡기 위해 파견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지도자들의 반응은 다급하고 비난조입니다. 예수를 배척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그 안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46절에서 병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은 "οὐδέποτε οὕτως ἐλάλησεν ἄνθρωπος"로, 문자적으로는 "어떤 사람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단지 직무를 수행하던 중에 예수의 말씀을 들었고, 그것이 단순한 인간의 말이 아님을 직감한 것입니다. 이는 말씀 자체가 권세였고, 병사들의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고 고백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말씀 앞에서 중립적일 수 없었다는 사실이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붙드실 때, 가장 강한 무장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오만과 영적 무지 (47-49절) 47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여기서 '미혹되다'(...

요한복음 7:37-44 강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예수님의 공생애 중 유대인의 큰 명절인 초막절의 마지막 날,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께서 외치신 말씀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라 구속사의 깊은 초대를 담은 선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37-44는 예수께서 생수의 근원이심을 드러내며, 그분을 통해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중심 본문입니다. 이 장면은 유대인의 축제와 신약의 성령 강림을 연결하며, 메시아에 대한 각자의 반응이 삶의 결정적 방향을 가른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초막절의 의미와 예수님의 외침 (37절) 37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초막절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 하나로,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하던 조상들을 기념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과 양식을 회상하는 절기입니다. 특히 마지막 날에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물 붓는 예식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보내실 메시아와 성령의 부어짐을 상징했습니다. 이 의식의 절정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외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여기서 헬라어 동사 '디프사오'(διψάω)는 단순한 갈증을 넘어서 영적 결핍과 갈망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공허와 죄로 인해 메마른 심령을 향한 초청입니다. 또한 "내게로 와서"라는 말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의 부르심으로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마름의 해갈은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과 믿음의 역사 (38-39절) 38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여기서 '믿는 자'(ὁ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έ)는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예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존재적 신뢰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

요한복음 7:25-36 강해 초막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때 예수님께서 초막절 중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군중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메시아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에 대한 깊은 신학적 질문을 드러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기원과 사역, 그리고 그분을 거부하는 자들과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25-27절) 25절에서 예루살렘 사람들, 즉 지역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이는 그들이 죽이려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며 놀라워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성전에서 담대히 말씀하시는 것을 목격하며 혼란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의 담대한 태도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시간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6절에서 그들은 또 말합니다.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그리고는 이방 사람들처럼 무지한 의문을 품습니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즉, 예수의 당당한 태도와 공적 가르침을 통해 지도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 것인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7절에서는 다시 불신의 기류가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노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그가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유대 전통 가운데 메시아는 갑작스럽고 신비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믿음에 장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표면적인 출신지에만 머물고, 예수님의 참된 기원, 곧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28-29절) 예수께서는 28절에서 성전에서 외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