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3 묵상, 니고데모의 갈망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때로는 익숙함 속에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교회도 다니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하고 있는지, 나는 정말 구원받은 자로서의 새 생명을 누리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이런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 ‘거듭남’이라는 신앙의 핵심을 깊이 있게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요구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그 속에 감추어진 갈망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1절) 니고데모는 단순한 유대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유대사회에서 종교적, 사회적 권위를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경건한 자였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여기서 ‘밤에’(헬. νυκτός, nyktos)라는 표현은 단지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종종 영적 무지, 두려움, 신앙의 갈등 상태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니고데모는 외적으로는 지도자였지만, 내면에서는 어떤 두려움과 질문,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선생’(헬. διδάσκαλος, didaskalos)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존경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고백이라기보다는, 기적과 표적에 대한 감탄에 머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신앙은 아직 ‘보는 믿음’이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인정은 하되,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신앙이 많습니다. 교회를 존중하고,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으로 인정하지만, 그분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믿음으로 복종하지는 않는 상태. 니고데모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지만, 예수님은 그의 중심을 보시고 곧장 가장 중요한 본질로 말씀을 이끄십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인사에 아무런 화답 없이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헬. ἀμὴν ἀμὴν, amēn amēn)는 예수님이 매우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실 때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마치 ‘아주 중요한 진리를 지금 너에게 말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곧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난다’는 이 표현은 헬라어로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gennēthē anōthen)인데, 문자적으로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는 영적인 재창조를 뜻합니다. 사람은 자연적인 출생으로는 죄된 본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고, 율법을 지켜도 본성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말은 단순한 시각적 관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니고데모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 여겼고,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자부심이 구원의 조건이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인간적 조건을 부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이나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교회 출석의 유무, 봉사의 횟수, 외적인 경건함이 거듭남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씀을 통해 내 속 사람이 새롭게 되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겨질 때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한 번의 형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거듭남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복음을 듣게 하시며,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신비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모든 순간에 은혜를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 성경이 믿어지게 된 것—all of these are by grace.

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시작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관심 없던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실제적 교제가 되고, 내 삶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새롭게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혹시 지금 신앙이 무기력하고, 기쁨이 없다면, 다시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거듭났는가?’라는 질문은 결코 비판적이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만드는 은혜의 질문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은 한 종교 지도자에게 주어진 놀라운 영적 각성의 선언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 밤의 만남 이후로 달라졌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공회에서 예수님을 변호했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을 준비해 장사 지내는 데 동참합니다. 그는 결국 거듭남의 은혜를 경험한 자로 살아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가? 성령께서 내 속에서 말씀을 조명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내 삶 가운데 영향을 주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솔직하게 서야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끝에서 은혜로 들어가는 문이며, 인간의 한계를 성령의 능력으로 넘어서는 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다시 깨우고, 하나님 나라의 참된 생명을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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