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22-27 영생을 위한 양식을 추구하라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는가

요한복음 6장 22절부터 27절까지는 오병이어 기적 이후 무리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은 단지 예수님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새로운 떡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동기를 꿰뚫어보시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이 본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예수를 찾는 무리 (6:22-24)

22절은 매우 중요한 관찰로 시작합니다. 무리들이 전날에 있었던 기적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다른 배가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정보는 단지 예수님의 동선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이 그 기적의 현장에서 어떤 갈증을 느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을 더 알고자 하기보다는, 전날 경험했던 배부름의 기적을 다시 맛보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23절에 따르면 디베랴에서 다른 배들이 도착했고, 무리들은 그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을 먹던 그 곳에"라는 말은 단순한 위치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축사하다"(εὐχαριστήσας, eucharistēsas)는 말은 단순한 감사 기도 이상의 의미로, 요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예수님의 자기 희생과 생명의 나눔을 상징하는 언어로 사용됩니다. 이는 이들이 무의식적으로나마 위대한 은혜의 현장에 다시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열망이 본질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4절은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도 없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도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향합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예수를 찾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를 쫓고 있으며, 열정적으로 그분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열심이 참된 신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열심은 오히려 정죄의 근거가 됩니다. 신앙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과 대상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진정 누구를 왜 찾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드러내신 예수님의 통찰 (6:25-26)

25절에서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발견하고 묻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이 질문은 외형적으로 공손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그분의 기적을 다시 기대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존재보다는 예수님의 능력, 곧 떡을 다시 얻고자 하는 갈망에 이끌려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육체적 만족과 눈앞의 필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그 내면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26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는 예수님께서 매우 중대한 진리를 선포하실 때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행위의 동기가 외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무리들은 표적을 보고도,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표적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시이지만, 그들은 그 표지판 자체를 붙잡고 그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떡을 통해 예수를 보아야 했지만, 예수를 통해 떡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위험한 태도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찾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봉사도 합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혹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삶의 문제 해결과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동기를 꿰뚫어보십니다. 진정한 표적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닙니다.

영생을 위한 양식을 추구하라 (6:27)

27절에서 예수님은 강력한 명령을 주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일하다'(ἐργάζεσθε, ergazesthe)는 헬라어 동사는 단순한 생계 노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몰두하고 추구하며 전심을 다해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열심을 다해 추구하는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썩을 양식, 즉 일시적이고 결국 사라질 양식을 얻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생의 양식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양식을 주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치셨다"(ἐσφράγισεν, esphragisen)는 표현은 헬라 문화에서 공문서나 물건에 소유권, 진정성, 권위를 부여하는 공식적인 인장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공식적으로, 권위 있게 파송받은 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자격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줄 수 없는 생명이며, 오직 하나님께 인침을 받은 자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신앙의 방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양식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 돈을 벌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안전을 위해, 평안을 위해...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오늘도 수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것을 위하여 수고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종교적 행위나 수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전인격적 신뢰와 믿음의 삶을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영생의 떡을 나눠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떡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는가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6장 22절부터 27절까지는 단지 예수님을 찾아 나선 무리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신앙의 질문입니다. "너는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가?" 무리를 꾸짖으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동기와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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