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장 주해적 묵상
로마서 10장 주해적 묵상
: 믿음의 의와 들음의 길,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
1. 본문 서두의 신학적 위치와 역할: 9–11장의 중심부에서 “구원의 길”을 다시 밝히다
로마서 10장은 9–11장이라는 큰 단락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9장이 이스라엘의 불신앙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ἔλεος)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라는 구속사적 토대를 세웠다면, 10장은 그 토대 위에서 “그렇다면 구원은 어떤 길로 주어지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11장이 다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미래의 소망과 경계의 권면으로 이어질 때, 10장은 현재의 자리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열려 있는 복음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8장의 확신 선언 이후 9장에 갑작스러운 눈물이 등장했던 것처럼, 10장도 바울의 목회적 심장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은 논증을 이기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속사의 난제를 다루면서도, 그 난제가 한 민족의 실제적인 상처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장은 신학의 언어와 목회의 언어가 가장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입니다. 이 장을 통과하면 독자는 한 가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숙명이 아니라, 복음 선포와 믿음의 응답을 통해 실제로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2. 바울의 목회적 마음과 이스라엘의 비극: 열심(ζῆλος)은 있으나 지식(ἐπίγνωσις)이 없다
2.1 구원을 향한 간구: 논쟁보다 앞서는 중보의 자리
바울은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비는 바”가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태도는 두 극단을 막아 줍니다. 하나는 냉소입니다. “저들은 이미 끝났다”는 체념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죄입니다. “저들은 나쁜 사람들이다”라는 단순화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심각하게 말하지만, 그들을 향한 태도는 끝까지 간구입니다. 이는 복음이 사람을 우월감이 아니라 긍휼의 길로 이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옳게 이해할수록 잃어버린 자를 향해 차갑게 멀어지기보다, 더 뜨겁게 기도하며 더 겸손히 섬기게 됩니다.
2.2 열심의 방향이 어긋날 때: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를 알지 못함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ζῆλος)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ἐπίγνωσις)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의를 이루시는지에 대한 분별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νόμος)을 사랑했고 거룩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자기 의”를 세우는 방식으로 흐를 때, 열심은 복음의 문을 닫는 열쇠가 됩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에 복종하지 않았다(ὑποτάσσω)고 말합니다. 복종은 단지 순종 윤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방식에 자신을 굽히는 태도입니다. 복음 앞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은 대개 도덕적 결심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맡기는 싸움입니다.
3. 핵심 주제의 성경신학적 의미: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τέλος νόμου)이라는 선언
3.1 끝(τέλος)의 의미: 폐기가 아니라 성취와 목표의 도달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δικαιοσύνη)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끝(τέλος)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끝(τέλος)은 율법을 무가치하게 만들었다는 뜻으로만 읽히기 쉽지만, 바울의 문맥에서는 성경신학적 깊이가 더 큽니다. τέλος는 종결이면서 동시에 목표입니다. 율법이 향하고 있던 목적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도달되었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 주었고, 인간의 죄를 드러냈으며, 언약 백성이 어떤 삶으로 부름받았는지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이길 능력을 인간에게 공급하지 못했습니다. 그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πνεῦμα)의 새 언약 역사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무너뜨리는 분이 아니라, 율법이 말하려 했던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3.2 의의 두 길: 행위로 얻으려는 의와 믿음으로 받는 의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서 말하는 “행함의 길”을 언급하며, “행하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율법 자체의 선함과 정당성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원리가 인간의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그 길을 통해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곧바로 “믿음에서 난 의”를 말합니다. 여기서 의(δικαιοσύνη)는 단순한 도덕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옳다 하심을 얻는 관계적 지위이며,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로마서 10장은 이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 열림의 방식은 공로의 누적이 아니라 믿음(πίστις)의 응답입니다.
4. 신명기 30장의 재해석: 가까운 말씀(ῥῆμα)과 복음의 현재성
4.1 “하늘에 올라갈 필요”와 “깊은 데 내려갈 필요”가 없다
바울은 신명기의 말씀을 끌어와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누가 깊은 데 내려가겠느냐”라는 문장을 복음의 언어로 새롭게 읽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의 불가능을 메우려는 모든 시도를 끊어 내는 방식입니다.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셔 오려는 시도는 결국 “내가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자기 의의 논리로 연결됩니다. 깊은 데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시도 역시 “내가 구원의 조건을 마련하겠다”는 착각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복음이 그런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값을 치르고 가져오는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가져오신 소식입니다.
4.2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들음의 복음과 믿음의 자리
바울은 “말씀(ῥῆμα)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마음(καρδία)과 입(στόμα)은 단지 내면과 외면을 구분하는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입니다. 복음은 머리로만 이해되는 정보가 아니라,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전인적 응답을 요구합니다. 바울은 믿음(πιστεύω)과 시인(ὁμολογέω)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숨겨진 내적 감정으로만 머물지 않고, 입술의 고백으로 세계 앞에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의 핵심은 예수의 주권입니다.
5. 구원론의 핵심: 예수를 주(κύριος)로 시인하고 부활을 믿는 믿음
5.1 “예수는 주”라는 고백: 구원은 예배의 중심 이동이다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κύριος)로 시인하면”이라고 말합니다. κύριος는 단지 존칭이 아니라 통치자의 칭호이며,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긴밀히 연결된 호칭으로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주”라는 고백은 단지 예수를 존경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6장이 “누구의 종이 되느냐”를 물었다면, 로마서 10장은 그 종됨이 실제로 무엇을 향해 열려 있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를 κύριος로 고백한다는 것은 삶의 중심이 자기 통치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로 옮겨졌음을 인정하는 예배적 전환입니다.
5.2 부활 신앙과 의의 확정: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사실이 믿음의 토대다
바울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부활은 단지 기적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되었다는 공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는 사실은 십자가가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성취였음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추상적 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로마서 10장은 복음을 매우 단순하게 요약하지만, 그 단순함은 가벼움이 아니라 중심의 명료함입니다. 구원은 결국 그리스도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6. 교회론적 연결: 들음(ἀκοή)과 전파(κηρύσσω)로 존재하는 공동체
6.1 “어찌 믿으리요, 어찌 들으리요”: 교회는 선포의 사명을 가진 몸이다
바울은 연속된 질문을 던집니다. 부르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믿으며,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부르며,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며, 보내심이 없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바울의 논지는 분명합니다. 구원은 개인의 종교적 재능으로 발견되는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세상에 선포하게 하신 복음의 소식으로 전달됩니다. 교회론적으로 교회는 ‘복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이전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심 받은 공동체’입니다. 보냄은 우연한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전파(κηρύσσω)는 단지 설명이나 토론이 아니라, 왕의 소식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복음은 의견이 아니라 선언이며, 교회는 그 선언을 맡은 증인 공동체입니다.
6.2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 선교는 교회의 장식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는 예언의 언어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미적 감상이 아니라, 구원의 소식이 도달하는 그 경로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자기 안에서만 완결되는 종교 조직이 되면, 로마서 10장은 교회를 다시 길 위로 내보냅니다. 복음은 전해져야 하며, 전해짐을 통해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프로그램이 많아서가 아니라, 복음의 소식을 들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때문에 교회입니다.
7. “믿음은 들음에서”: 말씀(ῥῆμα)과 순종(ὑπακοή)의 관계
7.1 들음(ἀκοή)의 신비: 믿음은 내면에서 생성되는 힘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πίστις)은 들음(ἀκοή)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ῥῆμα)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믿음의 기원을 인간의 심리나 성향에서 찾지 못하게 합니다. 믿음은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는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생겨나는 응답입니다. 여기서 말씀(ῥῆμα)은 살아 있는 선포의 언어이며, 단지 기록된 글자만이 아니라 복음으로 선포되어 마음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장은 결국 말씀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교회가 말씀을 잃으면, 결국 믿음은 불안한 열심이나 자기 확신의 기술로 변질됩니다.
7.2 “다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복음은 들림으로 끝나지 않고 순종을 낳는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들었는가를 묻고, 들었다고 답합니다. 그런데도 “다 복음에 순종(ὑπακοή)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단지 윤리적 행실이 아니라, 복음 자체에 대한 응답입니다.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며,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들었으나 순종하지 않았다는 진단은, 복음이 단지 정보 전달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복음은 결단을 요구하며, 그 결단은 결국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회개(μετάνοια)와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8.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구속사적 비극 속에서도 닫히지 않은 문
바울은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라고 묻고, 모세와 이사야의 증언을 통해 이방인의 포함이 이미 예언된 길임을 보여 줍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선언은, 구원이 철저히 은혜(χάρις)의 사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내가 종일 손을 벌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을 기다렸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습은 차갑게 문을 닫는 하나님이 아니라, 손을 벌려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9장이 주권의 언어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드러냈다면, 10장은 그 왕 되심이 곧 무정함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μακροθυμία)과 초청의 인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결론은 정죄의 쾌감이 아니라, 복음 초청의 비통함과 인내입니다.
9. 바울의 목회적·구속사적 의도: 이방인의 교만을 꺾고, 교회의 선교를 깨우며, 이스라엘을 향한 소망을 지키다
로마서 10장의 바울은 동시에 여러 방향을 향해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열심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며, 그 열심이 복음으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함을 권합니다. 이방인에게는 “너희가 믿게 된 것은 너희가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임을 암시하여 교만을 막습니다. 그리고 교회 전체에게는 복음이 어떻게 전달되고 믿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여 주어, 교회가 말씀 선포와 파송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이 우연한 차선책이 아니라, 이미 성경 속에 예언된 하나님의 큰 계획임을 증언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해 “종일 손을 벌리시는 하나님”을 말함으로, 11장에서 펼쳐질 더 큰 소망의 문을 열어 둡니다.
10. 묵상적 결론: 복음은 가까이 와 있으며, 교회는 그 가까움을 세상에 전하는 몸이다
로마서 10장이 우리에게 남기는 묵상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야 얻는 것도 아니고, 깊은 데로 내려가야 얻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셨고, 그 복음의 말씀(ῥῆμα)이 우리의 마음(καρδία)과 입(στόμα)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자기 의를 더 정교하게 쌓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κύριος)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음을 믿는 믿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 단순함은 얕음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가장 중심에 두는 단순함입니다.
동시에 이 장은 교회를 조용히 흔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전파를 통해 일어나며, 전파는 보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복음의 선포를 잃을 때, 신앙은 열심만 남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살아서 선포될 때, 하나님은 그 들음 속에서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안에서만 완결되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들고 길을 나서는 공동체로 존재합니다. 또한 이 장은 우리를 정죄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마음처럼,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 앞에서 교회가 가질 태도는 우월감이 아니라 간구이며, 포기가 아니라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이 종일 손을 벌리고 기다리신다면, 교회도 그 손길을 닮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은 결국 복음의 길을 다시 한 번 정돈해 줍니다.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는 믿음(πίστις)으로 받으며, 그 믿음은 들음(ἀκοή)으로 일어나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ῥῆμα)로부터 옵니다. 이 흐름을 마음에 새길 때, 성도는 자기 열심을 자랑하지 않고, 교회는 자기 존재를 과시하지 않으며,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복음을 붙들고 또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바울이 흘린 눈물의 무게만큼이나, 하나님이 벌리고 계신 손의 넓이를 다시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