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 주해적 묵상
로마서 3장 주해적 묵상
: 죄 아래의 세계에서 “이제”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
1. 본문 서두의 신학적 위치와 역할: “막다른 길”에서 “이제”로 넘어가는 경첩
로마서 3장은 로마서 전체의 구조에서 경첩과 같은 장입니다. 1장 후반에서 바울은 이방 세계의 우상숭배와 창조 질서의 붕괴를 통해 죄(ἁμαρτία)의 실상을 드러냈고, 2장에서는 남을 판단하는 종교적 도덕주의와 율법(νόμος)을 소유한 유대인의 특권 의식을 무너뜨렸습니다. 3장 전반(3:1-20)은 그 논증의 정점으로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판결을 확정합니다. 그리고 3장 후반(3:21 이하)은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निर्ण적인 전환, 곧 “이제”(νυνί) 드러난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로 독자를 이끕니다. 이 전환은 단순히 분위기의 변화가 아니라, 구속사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국면으로 들어갔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의 목회적 지혜는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먼저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모든 지지대를 제거합니다. 민족적 특권, 종교적 행위, 도덕적 비교, 율법 지식의 자부심을 하나씩 걷어내며, 인간이 자기 의를 세울 수 있는 길이 실제로는 막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을 절망 속에 방치하지 않습니다. 절망이 복음을 위한 준비가 되게 합니다. 로마서 3장은 죄의 보편성을 확정함으로 복음의 보편성을 열어 주는 장이며, 교회가 왜 “은혜의 공동체”여야 하는지, 그리고 왜 교회 안에서 자랑(καύχησις)이 사라져야 하는지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입니다.
2. 핵심 주제의 성경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불신실함 사이에서
2.1 유대인의 유익과 하나님의 신실하심(πιστός): 언약은 인간의 실패로 폐기되지 않습니다
3:1-8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유익이 무엇이며 할례의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는 형식으로 논의를 이어 갑니다. 바울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유익이 큽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들”(λόγια)을 맡았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운 특권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은 2장에서 유대인의 위선을 날카롭게 폭로했지만, 그렇다고 구약의 계시와 이스라엘의 위치를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신실하심(πιστός)을 드러내시는가입니다.
3:3에서 바울은 유대인 중 어떤 자들이 불신실했다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폐하여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실하심”은 단순한 성품 묘사가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 의지입니다. 구약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배반하는 백성을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이 신실하심은 로마서 9–11장에서 더 크게 펼쳐지지만, 그 씨앗은 이미 3장 전반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불의와 실패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낸다고 해서, 죄가 도리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는” 논리를 강하게 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죄의 변명거리로 바꾸는 종교적 궤변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은 죄를 허용하는 안전장치가 아니라, 회개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2.2 심판의 하나님과 복음의 하나님: 의(δικαιοσύνη)는 판결이면서 구원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라는 질문으로 논의를 정리합니다. 이 한 문장은 로마서 3장의 깊은 곳에 놓인 신학적 핵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구원입니다. 로마서 3장은 이 신비를 가장 정교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을 살리는 길 또한 하나님 자신이 마련하십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복음은 either 값싼 용서이거나 차가운 정죄로 변질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그 균형을 십자가라는 한 지점에 집중시킵니다.
3. 죄의 보편성과 율법의 한계: 성경이 증언하는 “모두”의 무능력
3.1 “다 죄 아래”(ὑφ’ ἁμαρτίαν): 죄는 개인의 실수 이상으로 ‘지배’입니다
3:9-20에서 바울은 결론을 내립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ὑφ’ ἁμαρτίαν)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죄가 단지 인간이 저지르는 개별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을 포괄하는 지배 질서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래 있다”는 표현은 죄의 권세가 인간을 덮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구약의 여러 본문을 엮어 의인은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성경의 증언을 제시합니다. 이는 특정 민족이나 특정 시대의 도덕적 낙인을 찍기 위한 말이 아니라, 죄가 인간의 마음과 말과 행위에 스며든 보편적 실상을 드러내기 위한 성경적 진단입니다.
바울은 죄의 흔적을 인간의 말에까지 확장합니다. 혀와 입술과 입, 곧 말의 세계가 타락해 있음을 말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이는 창세기의 타락 이후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진리를 말해야 할 입이, 거짓과 폭력과 저주를 생산하는 도구로 변질됩니다. 죄는 인간의 지성만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찢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보편성은 곧 구원의 필요의 보편성이며, 교회는 도덕적 우월집단이 아니라 “모두가 은혜로만 산다”는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됩니다.
3.2 율법(νόμος)의 기능: 의를 주지 못하지만 죄를 밝히는 빛입니다
3:20은 로마서 1–3장의 논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율법의 행위(ἔργα νόμου)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ἐπίγνωσις ἁμαρτίας)이니라.” 바울은 율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참된 기능을 회복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계시이지만, 죄를 이긴 인간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은 의를 ‘제공’하기보다 죄를 ‘노출’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살리는 약이기 전에, 인간의 병을 진단하는 빛입니다. 빛은 어둠을 고치지 못하지만, 어둠을 숨기지 못하게 합니다.
이 대목은 교회에 매우 목회적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곧 의로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먼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우며,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 의를 만들고 자기를 변호하는지 폭로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면, 그 깨달음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복음의 문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입이 막히고”(3:19)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침묵은 신앙이 무너지는 침묵이 아니라, 은혜 앞에서 변명이 멈추는 침묵입니다. 복음은 그 침묵을 전제로 시작됩니다.
4. “이제”(νυνί) 드러난 하나님의 의: 율법 밖에서, 그러나 성경 안에서
4.1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의 계시: 새로운 길이면서 오래된 약속의 성취입니다
3:21에서 바울은 결정적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제”(νυνί)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 부사가 아니라, 구속사의 전환을 알리는 종말론적 표지입니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πεφανέρωται)”라고 말할 때,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 주셨음을 말합니다. 동시에 바울은 이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언을 받았다”고 덧붙입니다. 즉 복음은 구약과 단절된 새 종교가 아니라,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사건입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언약의 성취와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기 의를 보존하면서도 죄인을 살리시는 길을 여십니다. 그 길은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여기서 “나타났다(φανερόω)”는 표현은 감춰졌던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역사 속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비밀스러운 지식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역사 속에 공적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길입니다.
4.2 믿음(πίστις)으로 받는 의: 보편성은 차별의 제거가 아니라 은혜의 확장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πίστ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을 통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구절은 해석의 논의가 있지만, 본문의 흐름에서 핵심은 분명합니다. 의는 믿음을 통해 주어지며, 그 대상은 “모든 믿는 자”입니다.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의 공로가 같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가 보편적이기 때문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보편적으로 열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곧바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δόξα)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죄의 결과는 단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미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지음받았는데, 죄는 그 영광의 목적지에서 인간을 이탈시킵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지 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회복입니다. 이 회복이 로마서 8장의 영화(δόξα)와 창조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5. 칭의와 속량과 화목제물: 하나님이 의로우시면서도 의롭다 하시는 방식
5.1 의롭다 하심(δικαιόω)과 은혜(χάρις): 칭의는 상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3:24에서 바울은 칭의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χάρις)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δικαιόω)을 얻는다.” “값없이”라는 말은 공로가 없다는 뜻이며, 은혜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라고 판결하시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단지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법정적 선언이며 관계의 회복을 여는 선포입니다. 그러나 그 선언이 임의적 판결이 되지 않도록, 바울은 곧바로 그 근거를 말합니다.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입니다.
5.2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과 해방의 이미지: 구원은 값 지불 없는 허용이 아닙니다
속량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값을 치르는 언어입니다. 바울은 인간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단순한 사면이 아니라, 지배의 전환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서 풀려나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속량의 언어는 출애굽의 구속사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죄의 종살이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십니다. 교회는 이 해방의 공동체이며, 세상 한복판에서 새로운 주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백성입니다.
5.3 화목제물(ἱλαστήριον)과 피(αἷμα):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서 “증명”됩니다
3:25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화목제물(ἱλαστήριον)로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의 속죄소를 떠올리게 하며, 동시에 죄를 덮고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피(αἷμα)로 말미암아 믿음으로”라고 말합니다. 피는 생명의 자리이며, 죄의 결과로 요구되는 죽음의 현실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는 단지 사랑의 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는 의의 자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πάρεσις) 가운데서도 자기 의를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간과는 무책임한 방치가 아니라, 참으심(ἀνοχή) 가운데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를 निर्ण적으로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인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눈감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죄를 직면하고 처리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처리 방식이 죄인을 멸망시키는 심판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는 구원의 길이 되었다는 점에서 복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도 의로우시며(δίκαιος)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δικαιοῦν)”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3장의 중심은 바로 이 두 문장을 함께 세우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기에 죄인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서로 다투지 않고 하나로 드러난 자리입니다.
6. 교회론·구원론·종말론적 연결: 자랑이 사라진 공동체, 한 하나님 아래 한 백성
6.1 자랑(καύχησις)의 배제와 믿음의 법: 교회는 비교가 아니라 은혜로 세워집니다
3:27에서 바울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라고 말하며, 그것이 “배제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자랑의 배제는 개인의 겸손 미덕을 넘어, 교회를 세우는 원리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로마 교회에서 자랑은 분열의 연료가 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논리를 통해 그 연료를 제거합니다. 칭의는 행위의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법”(νόμος)은 규정의 목록이라기보다, 작동 원리입니다. 교회는 공로의 원리가 아니라 은혜의 원리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월감은 신학적으로 설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6.2 한 하나님(εἷς θεός)과 한 백성: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은 부수적 결과가 아니라 복음의 목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므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믿음으로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의롭다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일치는 단지 화목의 감정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한 복음으로 한 백성을 만드신다는 신학적 토대 위에 서야 합니다. 복음은 개인을 하나님께로만 돌려놓지 않고,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3장은 칭의 교리를 말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형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론은 교회론으로 흘러가며, 교회론은 구원론을 증언합니다.
6.3 종말론적 “이제”(νυνί)와 현재의 삶: 의의 계시는 미래의 판결을 앞당겨 보여 줍니다
로마서 3장의 “이제”는 종말론적 시간 감각을 전제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의가 역사 속에 드러났다면, 우리는 이미 최종 심판의 기준이 세워진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종말의 심판이 미래에 오더라도, 그 심판의 본질은 이미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두려움만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확신을 줍니다. 구원은 불확실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사건에 기초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거룩한 삶의 토대가 됩니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에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부름받습니다. 이 흐름이 로마서 6–8장의 성화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7. 바울의 목회적·구속사적 의도: 죄의 평준화로 은혜의 보편성을 세우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죄를 평준화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가 복음 선교의 전진기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분열된 교회는 복음을 선명하게 전할 수 없습니다. 민족적 우월감과 종교적 자부심이 교회 안에 남아 있다면, 복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가 된 일”로 변질됩니다. 바울은 그 위험을 막기 위해,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한 뒤, 오직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의 자랑도, 이방인의 자랑도 남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와 은혜만 남깁니다. 바울의 목회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기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복음의 질서입니다.
8. 묵상적 결론: 변명이 멈춘 자리에서 시작되는 은혜의 언어
로마서 3장을 깊이 따라가면, 우리의 신앙은 한 지점으로 수렴합니다. 우리는 결국 말이 멈추어야 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고, 성경이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위를 비추어, “의인은 없다”는 진단 앞에서 변명할 수 없게 될 때, 그 침묵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은혜의 시작이 됩니다. 인간의 언어가 자기 변호를 멈출 때, 복음의 언어가 들립니다. “이제”(νυνί)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그 의는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근거는 우리의 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αἷμα)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되, 죄인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의를 세우시며 동시에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 복음을 아는 교회는 스스로를 과시할 수 없습니다. 자랑(καύχησις)은 배제되고, 남는 것은 감사와 경외입니다. 믿음(πίστις)은 공로의 대체물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빈 손이며, 그 빈 손이야말로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함께 살리는 공동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로마서 3장은 우리를 낮추지만, 그 낮아짐은 무가치함이 아니라 참된 자유로 인도합니다. 자기 의를 붙들던 손을 놓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단지 죄책을 덜어내는 위로에 머무르지 않고,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삶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옮겨지는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의 현실을 열어 줍니다. 결국 로마서 3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 길을 남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신뢰하며 사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교회는 다시 시작되고, 성도는 다시 숨을 쉬며, 복음은 다시 세상의 한복판으로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