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시편10편 숨어 계신 하나님

 

숨어 계신 듯한 하나님께 부르짖는 믿음

오늘도 말씀 앞에 조용히 앉습니다. 시편 10편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에 드리는 탄식입니다. 악인은 교만하게 약한 자를 압제하고,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말하며, 자기 욕망을 신처럼 섬깁니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호소하며, 마침내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왕을 고백합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은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악을 악이라 부르고, 약한 자의 눈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영원한 왕이신 여호와의 공의를 기다리는 것임을 배웁니다.

멀리 계신 듯한 하나님 앞에서도 믿음은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시 10:1-4)

시편 10편은 매우 솔직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저는 이 첫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는다고 확신했다면 부르짖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계신 줄 알기에 묻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줄 알기에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기에, 지금의 침묵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신앙의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에게 언제나 고요하고 단정한 언어만 허락하지 않습니다. 시편은 우리의 신앙이 때로 질문으로, 때로 울음으로, 때로 견딜 수 없는 침묵 앞의 탄식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찌하여”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심판하려는 교만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는 믿음의 몸부림일 수도 있습니다. 시편 10편의 질문은 후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려고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묻습니다.

“멀리 서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실제로 공간적으로 멀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고난 중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환난 때에는 시간이 길어지고, 침묵은 무거워지며, 악인의 웃음은 더 크게 들립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늦어지는 듯하고, 억울한 자의 눈물은 땅에 떨어지는 듯하며, 악인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번성합니다. 그때 영혼은 묻습니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

저는 이 질문을 제 마음에도 들여놓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면서도, 현실의 어둠이 너무 짙으면 마음은 흔들립니다. 왜 악인은 저렇게 당당한가. 왜 약한 사람은 계속 눌리는가. 왜 거짓은 빠르게 퍼지고 진실은 느리게 드러나는가. 왜 하나님은 즉시 일어나시지 않는가. 이런 질문이 제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0편은 이런 질문을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가져가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묻는 질문은 이미 하나님께 향한 기도입니다.

2절은 악인의 모습을 말합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여기서 악인의 핵심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단순히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기 힘과 욕망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을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 태도입니다. 악인의 교만은 추상적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약한 자를 압박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가련한 자”는 힘없는 사람, 사회적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사람, 자기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 힘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시편 10편은 악을 단지 개인적 도덕의 문제로만 보지 않습니다. 악은 약한 사람을 억압하는 구조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련한 자를 이용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약한 사람의 숨을 조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들의 자랑보다 약한 자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역전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악인은 꾀를 베풉니다. 계획하고, 계산하고, 덫을 놓고, 사람을 조종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꾀에 그들 자신이 빠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복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가 드러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악이 무한히 성공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빠뜨리기 위해 판 웅덩이에 악인 자신이 빠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3절은 악인의 내면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욕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합니다. 여기서 욕심은 히브리어 타아와(תַּאֲוָה)의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강한 욕망, 갈망, 탐심입니다. 욕망 자체가 모두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떠난 욕망은 쉽게 우상이 됩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셔야 할 마음의 자리에 자기 욕망을 앉힙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성공과 능력의 이름으로 자랑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오늘의 시대를 매우 날카롭게 비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욕심을 능력으로 포장하는 시대를 삽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을 야망이라 부르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경쟁력이라 부르며, 끝없는 자기 확장을 성취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 욕망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 성취가 다른 사람을 살립니까, 짓밟습니까? 그 성공이 주의 이름을 높입니까, 자기 이름을 높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욕망의 자랑은 결국 여호와를 멸시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합니다. 탐욕은 단순히 많이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탐욕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충분함을 배우지 못하고, 감사의 질서를 깨뜨리며, 이웃의 몫까지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마음입니다. 탐욕은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하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 더 가져야 살 수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보다 내 소유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4절은 악인의 영적 뿌리를 분명히 말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여기서 얼굴은 사람의 태도와 방향을 보여 줍니다. 교만한 얼굴은 하나님 앞에 낮아지지 않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감찰은 살피고 찾고 조사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하나님이 계셔도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악인의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씀은 무겁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입으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삶의 계획과 판단과 욕망과 관계 속에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결정하고, 하나님이 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계획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내 분노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내 돈의 사용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구속사적으로 보면, 시편 10편의 악인은 인간 죄성의 깊은 얼굴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잊고 자기 욕망을 자랑하며 약한 자를 압제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걸어온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는 교만한 얼굴로 오지 않으셨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자기 욕심을 자랑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가련한 자를 압박하지 않으시고 병든 자와 죄인과 소외된 자 곁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상으로 살지 않으시고, 매 순간 아버지와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사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겸손이 만난 자리입니다. 악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악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가장 깊이 다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과 악의 현실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오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신 듯하지만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오늘 저는 시편 10편의 첫 부분 앞에서 두 가지를 결단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한 시간에도 질문을 기도로 바꾸겠습니다. “어찌하여”라는 탄식을 하나님께 가져가겠습니다. 둘째, 내 안의 교만과 욕망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악인을 남의 이야기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없이 생각하려는 내 마음의 작은 무신론을 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두려움과 위로로 함께 붙들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 때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질문하십시오. 그 질문을 불신의 독백으로 만들지 말고 믿음의 기도로 올려 드리십시오. 그리고 악인의 교만을 보며 분노할 뿐 아니라, 내 안의 욕심과 하나님 없음도 함께 살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십자가로 가신 길이 우리의 길을 다시 바로잡습니다.

악인은 숨어서 약한 자를 잡지만 하나님은 그 숨어 있는 악을 보십니다 (시 10:5-11)

시인은 이제 악인의 삶이 겉으로는 형통해 보이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며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저는 이 구절 앞에서 믿음의 사람이 느끼는 깊은 곤혹을 봅니다. 악인이 늘 실패한다면 문제는 단순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의 길이 견고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거짓된 사람이 성공하고, 교만한 사람이 높아지고, 약한 사람을 압박하는 사람이 더 안전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신앙은 흔들립니다.

악인의 형통은 시편 전체의 큰 질문입니다. 왜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번성하는가. 왜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 더 편안해 보이는가.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눈물 흘리는데,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웃는가. 시편 10편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견고함은 영원한 견고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직 심판하지 않으시는 시간 속에서 잠시 허락된 듯 보이는 견고함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단단해 보이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다.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표현은 악인의 착각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너무 높아 자신에게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현실은 자기 손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저는 이것이 죄의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높다는 것은 악인이 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악인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판단이 크고 엄중하다는 뜻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멀리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입니다.

6절에서 악인은 마음에 말합니다.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거짓 평안입니다. 악인은 자기 번영을 영원한 안전으로 착각합니다. 지금 괜찮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자기 확신이 얼마나 허망한지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부자는 곳간을 크게 짓고 평안히 쉬자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셨습니다. 사람은 내일을 자기 것으로 확신하지만, 내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제 안의 거짓 안전감을 봅니다. 신자는 악인처럼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재정, 내 관계, 내 사역이 나를 지켜 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참 안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자기 기반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안정은 언젠가 드러날 불안입니다.

7절은 악인의 말의 세계를 드러냅니다.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입은 마음의 출구입니다. 악인의 마음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욕망을 자랑하니,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가득합니다. 말은 영혼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저주는 타인을 무너뜨리려는 말이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말이며, 포악은 말로도 폭력을 행사하는 태도입니다. 혀 밑에 잔해와 죄악이 있다는 표현은 말이 겉으로 나오기 전부터 이미 내면에 악이 저장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 구절 앞에서 입술의 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말은 가볍게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은 사람을 찢습니다. 악한 말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거짓된 말은 진실을 흐리며, 폭력적인 말은 약한 사람의 마음을 짓밟습니다. 특히 악인은 말로 약자를 제압합니다. 법과 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은 말로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을 들으십니다. 사람들의 귀에는 사라진 말도 하나님 앞에서는 남아 있습니다.

8절부터 10절은 악인의 은밀한 폭력을 사냥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그는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봅니다.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자기 그물로 끌어갑니다. 저는 이 이미지가 매우 두렵습니다. 악은 때로 공개적으로 소리치지만, 더 자주 숨어서 기다립니다. 약한 자가 방심할 때, 보호받지 못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덫을 놓습니다.

여기서 무죄한 자와 가련한 자가 반복됩니다. 시편 10편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강자의 논리보다 약자의 눈물을 보십니다. 악인은 가련한 자를 먹잇감처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십니다. 악인은 약한 자를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그를 자기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사람으로 보십니다. 이것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시각 차이입니다.

10절의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라는 표현은 악인의 위장된 낮아짐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는 엎드립니다. 그러나 겸손해서가 아니라 덮치기 위해서입니다. 악은 때로 겸손한 모양을 취합니다. 때로 친절한 얼굴을 하고, 때로 합리적 언어를 사용하며, 때로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포악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 분별을 요구합니다. 겉모양만 보지 말고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그 행동이 약한 사람을 살리는지, 무너뜨리는지 보아야 합니다.

11절은 악인의 신학을 다시 요약합니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악인은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죄의 가장 깊은 착각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기억을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오해하는 것이 악인의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 우리에게도 경고가 된다고 느낍니다. 은밀한 죄를 지속할 때 사람은 점점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괜찮다. 들키지 않았으니 안전하다. 하나님도 침묵하시니 넘어가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죄의 승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를 기다리시는 긍휼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간은 돌이키라는 부르심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은밀한 악의 희생자가 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은밀히 모의했고, 거짓 증인들을 세웠으며, 무죄한 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의 입에는 경건한 언어가 있었지만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영원히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어둠 뒤에 부활의 아침을 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 순간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신 것처럼 보이는 가장 깊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어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심판과 버림받음의 깊이를 담당하셨고, 부활로 하나님이 그를 잊지 않으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숨어 계신 듯한 시간에도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붙듭니다. 하나님은 악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음에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저는 이 본문 앞에서 약한 자의 눈물을 더 민감하게 보아야 함을 배웁니다. 악인이 숨어서 약한 자를 노린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드러내어 약한 자 곁에 서야 합니다. 악인이 말로 무너뜨린다면, 우리는 진실한 말로 세워야 합니다. 악인이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은밀한 자리에서의 삶이 하나님 앞의 진짜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이 은밀히 작동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보십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우리도 은밀한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은 억울한 자에게는 위로이고, 죄를 숨기는 자에게는 경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말과 욕망과 은밀한 생각을 내려놓고, 부활의 주님 안에서 진실과 긍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영원한 왕이시며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시 10:12-18)

시인은 마침내 하나님께 더 직접적으로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저는 이 기도가 시편 10편의 중심 전환이라고 느낍니다. 앞에서는 악인의 교만과 폭력을 묘사했고,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한 현실을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일어나 달라고 구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행동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믿음은 악을 오래 바라보다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악을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일어나옵소서”는 성경의 탄원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잠들어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행동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손을 드옵소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동적 개입을 구합니다. 손은 능력과 행동의 상징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말씀만이 아니라 행동을 구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기억이 구체적 구원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탄식입니다.

13절은 악인의 오만을 다시 묻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시인은 악인의 신학을 하나님 앞에서 고발합니다. 악인의 가장 큰 죄는 단지 약한 자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고, 묻지 않으시고, 책임을 요구하지 않으신다고 여깁니다. 이 생각이 모든 악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결국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4절은 시편 10편의 복음적 위로처럼 빛납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저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시인은 정반대로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건의 표면만 보지 않으십니다. 재앙도 보시고 원한도 보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폭력뿐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긴 영혼의 상처와 억울함까지 보십니다.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는 말씀은 마음을 깊이 울립니다. 외로운 자는 도움받을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보호자가 없고, 편들어 줄 사람이 없고, 자기 사정을 설명할 힘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를 의지합니다. 여기서 의지한다는 것은 자기 짐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기대기 어려운 사람이 하나님께 기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봅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자가 기대도 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무게를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고아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약자입니다. 보호자 없는 사람, 법적·사회적 안전망이 약한 사람, 쉽게 착취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고아의 아버지로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힘 있는 자들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고아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교회의 사명을 일깨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도 고아와 같은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 사회적 목소리가 약한 사람, 외로운 사람 곁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15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팔은 힘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악인의 팔을 꺾어 달라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약한 자를 해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권세의 힘을 끊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라는 표현은 숨겨진 악까지 드러내 달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은 표면적인 죄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감추어진 악, 구조 속에 숨어 있는 악, 말 뒤에 숨은 악, 의도 속에 감춰진 악까지 찾아내시는 분입니다.

저는 이 기도가 두렵고도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이 드러나기를 원하지만, 내 안의 악이 드러나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선택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악인의 악을 찾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내 안의 악도 찾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정직함입니다. “주님, 세상의 불의를 드러내소서. 그리고 제 안의 불의도 드러내소서.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그리고 제가 누군가를 억압하는 팔이 되지 않게 하소서.”

16절은 찬양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저는 이 고백이 시편 10편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고, 악인이 형통해 보이며, 가련한 자가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도, 여호와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인간 왕들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악인의 권세도 결국 끝나며, 나라들의 힘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왕권은 영원무궁합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시편 10편은 절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은 단지 종교적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와 정의와 구원의 최종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악은 마지막 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약한 자의 눈물은 땅에 버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교만한 나라와 사람은 심판 앞에 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신자는 낙심 속에서도 다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왕권의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다고 느낍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악이 커 보일수록, 우리는 더 깊이 말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십니다.

17절은 다시 하나님의 들으심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겸손한 자는 자신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악인과 반대되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자기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지만,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 소원을 올립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믿습니다. 악인은 약한 자를 이용하지만, 겸손한 자는 자기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는 표현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십니다. 기도하는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도록 마음을 세우시고, 부르짖을 힘을 주시며,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기도의 신비를 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먼저 내 마음을 준비하셨습니다. 내가 부르짖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먼저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은혜는 기도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를 감쌉니다.

18절은 시편 10편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약한 자를 위한 심판입니다.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세우기 위한 공의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단지 벌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위협받던 사람이 더 이상 위협받지 않게 되는 질서입니다. 압제하던 자의 힘이 꺾이고, 억눌린 자의 존엄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평화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들처럼 힘으로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의 편에 서셨고, 죄인과 병든 자와 소외된 자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왕권은 십자가에서 가장 이상한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압제당하는 자처럼 짓눌리셨고, 버림받은 자처럼 죽으셨으며, 폭력의 희생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시편 10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깊은 답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십자가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보십니까? 십자가에서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기억하십니까?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모든 압제가 끝난 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회복을 바라봅니다. 새 창조의 날에는 더 이상 위협하는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기도의 자리를 다시 붙듭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일어나옵소서”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약한 자의 고통을 볼 때 무심하게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겠습니다. 내 안의 교만과 탐욕을 회개하며, 겸손한 자의 마음을 구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겠습니다. 세상의 악이 아무리 커 보여도 왕은 여호와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자의 의지를 받으시고, 고아를 도우시며, 압제당하는 자를 위해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악인의 목소리가 크고,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십니다. 그 왕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마음을 준비시키시며, 귀를 기울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탄식도 그 왕 앞에서 버려지지 않습니다.

마무리

시편 10편은 하나님이 숨어 계신 듯한 시간에 드리는 깊은 탄식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말하며 약한 자를 압제하지만, 시인은 끝내 “주께서는 보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내 안의 교만과 탐욕을 회개하고,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의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악인의 형통에 낙심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로 왕 되신 그리스도께 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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