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장 강해
고린도후서 4장 강해
낙심하지 않는 새 언약의 사역
고린도후서 4장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말한 “새 언약의 직분”이 실제 사역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3장에서 새 언약은 문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것이며, 정죄의 직분이 아니라 의의 직분이고, 사라질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4장에서 그 새 언약의 사역자가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어떤 고난을 견디며, 어떤 소망으로 낙심하지 않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장의 반복되는 중심 정서는 “낙심하지 아니함”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하고, 16절에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다시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은 낙심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쓴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심할 이유가 너무 많은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고백하는 장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오해와 박해와 육체의 약함과 죽음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직분은 자기 야망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1). 사역의 근거가 자기 능력에 있으면 능력이 약해질 때 낙심합니다. 사역의 근거가 사람의 인정에 있으면 사람들이 비난할 때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역의 근거가 하나님의 긍휼에 있으면,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 사역
바울은 자신의 사역 태도를 먼저 밝힙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고후 4:2). 복음 사역자는 무엇보다 진실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쓰지 않았고, 인기를 얻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혼잡하게 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익에 맞게 섞고 변질시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고린도 사회에는 말재주와 철학적 수사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청중의 취향에 맞추어 말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그렇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한다”고 말합니다(고후 4:2).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역 원리입니다. 참된 사역자는 사람을 조작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선동하거나, 두려움을 이용하거나, 말씀을 자기 권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를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오늘날 설교자와 성경 교사도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청중이 좋아할 말만 골라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자기 분노와 편견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포장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말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으로, 그러나 흐리지 않고 전해야 합니다.
복음이 가려지는 이유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고후 4:3). 복음은 분명한 빛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가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복음 자체가 희미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4). 여기서 “이 세상의 신”은 사탄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합니다. 혼미하게 한다는 것은 영적 분별력을 흐리게 하여 복음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가장 큰 전략 중 하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욕망 때문에 복음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 교만 때문에 복음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처와 냉소 때문에 복음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자기 의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를 보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이 가려져 있으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눈앞에 있어도 그 영광을 깨닫지 못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고후 4:4). 복음은 단지 죄 사함을 얻는 방법만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고후 4: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 사역의 중심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이 구절은 모든 사역자의 심장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사역자는 자신을 전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지식, 자기 체험, 자기 명성, 자기 능력을 중심에 놓으면 복음 사역은 변질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은 복음의 핵심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교사나 성인이나 종교적 영감의 원천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며, 교회의 머리이시고, 온 세상의 심판자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내 삶의 조언자로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주로 고백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말합니다(고후 4:5). 여기서 놀라운 균형이 있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고, 사역자는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전하는 사람은 성도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가졌지만, 그 권위는 지배를 위한 권위가 아니라 섬김을 위한 권위였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도 이 원리 아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 장로, 교사, 찬양 인도자, 구역장, 봉사자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고, 성도를 섬기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창조의 빛과 복음의 빛
바울은 복음의 빛을 창조의 빛과 연결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어둠 가운데 빛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구원도 새 창조의 사건으로 봅니다. 죄로 어두워진 마음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빛을 비추실 때, 사람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눈을 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사건입니다. 내가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은 단지 지적 이해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랑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은 깊습니다(고후 4:6). 하나님의 영광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얼굴,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 죄인을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 얼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얼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세상은 영광을 힘과 성공과 지배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가장 깊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낮아지심 속에서, 자기 비움 속에서, 죄인을 위한 대속의 사랑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
바울은 복음 사역자의 존재를 매우 인상적인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 여기서 보배는 복음,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질그릇은 연약한 인간 존재를 뜻합니다. 질그릇은 흔하고 약하며 쉽게 깨집니다. 바울은 자신을 금그릇이나 은그릇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질그릇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보배입니다. 복음 사역자의 가치는 그 사람의 화려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연약한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으십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통해 자기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만일 사역자가 너무 완벽하고, 너무 강하고, 너무 화려해서 사람들이 그 사람만 바라본다면 복음의 영광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그릇 같은 사람을 통해 생명의 복음이 전해질 때,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능력은 그릇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역자에게 겸손을 주고, 동시에 위로를 줍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쉽게 지치고, 상처받고, 흔들리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그릇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자기 영광으로 빛나는 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담고 하나님께 능력을 돌리는 그릇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바울은 질그릇 같은 사역자의 현실을 네 가지 대조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첫째,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지만 싸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많은 압박을 받았습니다. 외부의 박해, 내부의 오해, 육체의 피로, 영적 부담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갇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답답한 일을 당하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답답함은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역에도,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문이 열리지 않고, 애써도 변화가 없으며,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마음을 누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낙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박해를 받지만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바울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외면당할 수 있고, 신앙 때문에 고난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넷째,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대조는 기독교적 승리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승리는 고난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승리는 고난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압박을 받지만 갇히지 않고, 답답하지만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받지만 버림받지 않고, 넘어지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고후 4:10). 여기서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과거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의 죽음의 흔적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고, 버림받으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약함과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죽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후 4:10).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와 부활의 패턴을 따릅니다. 죽음이 먼저 있고 생명이 드러납니다. 자기 부인이 있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약함이 있고 은혜가 드러납니다. 바울은 자기 고난을 무의미한 고통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성도의 몸은 죽을 육체입니다. 약하고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을 육체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우리 안에는 사망, 너희 안에는 생명
바울은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합니다(고후 4:12). 사역자는 자기 생명을 내어 줌으로 성도 안에 생명이 역사하게 합니다. 바울의 고난은 고린도 교회의 유익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음 같은 고난을 감당했고, 그 결과 성도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목회의 원리입니다. 목회와 사역은 자기 보존의 길이 아니라 자기 내어줌의 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듯, 목회자는 성도를 위해 자신을 내어줍니다. 교사도, 전도자도, 기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생명을 세우는 일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이 들어갑니다.
물론 이것이 사역자의 소진이나 무리한 자기 파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의 본질에는 분명 자기희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듯이, 그리스도의 종들도 자기 편안함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사랑의 희생을 통해 흘러갑니다.
믿음의 영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시편 116편을 인용합니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 4:13). 복음 전파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믿었기 때문에 말했습니다.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믿었고, 부활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의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증언입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힘 있게 전할 수 없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내 안에서 참된 생명이 될 때, 그 복음은 말과 삶으로 흘러나옵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고후 4:14). 바울의 담대함은 부활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었지만, 그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면, 예수께 속한 자들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사역자의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고난은 피해야 할 절대적 재앙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다면 고난도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죽음도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성도를 그리스도와 함께 세우실 것입니다.
은혜가 감사로 넘치게 하려 함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사역이 성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5).
복음 사역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람들에게 임하고, 그 은혜가 감사로 바뀌며, 그 감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것이 사역의 아름다운 흐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들은 그 은혜를 받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다시 하나님께 영광으로 올라갑니다.
교회는 감사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 때 감사가 생깁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은혜이고, 오늘도 붙들리는 것이 은혜이며,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도 은혜임을 알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불평은 은혜를 잊은 마음에서 나오고, 감사는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의 두 번째 큰 전환점입니다.
겉사람은 육체적 생명과 외적 조건을 포함합니다. 바울의 겉사람은 실제로 낡아지고 있었습니다. 매 맞음, 감옥, 여행, 피로, 질병, 박해가 그의 몸을 소모시켰습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겉사람이 낡아집니다. 건강은 약해지고, 체력은 줄고, 외적 조건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워지는 내적 생명입니다. 바울은 겉사람이 낡아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이 말씀은 노년의 성도에게도, 병중의 성도에게도, 지친 사역자에게도 큰 위로입니다. 몸이 약해진다고 믿음까지 반드시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 조건이 무너진다고 내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겉사람이 약해지는 과정 속에서도 속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잠깐의 환난과 영원한 영광
바울은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비교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이 말씀은 고난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고난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잠시”와 “경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장차 나타날 영광이 너무 크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대조가 있습니다. 현재의 환난은 잠시입니다. 장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현재의 환난은 경합니다. 장래의 영광은 중합니다. 고난 자체만 바라보면 그것은 무겁고 길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은 잠시이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광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성도는 고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만 보지도 않습니다. 성도는 장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주님 앞에 서는 날, 눈물이 씻겨지는 날을 바라봅니다. 그 소망이 현재의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바울은 마지막으로 신앙의 시선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보이는 것은 강력합니다. 고난은 보입니다. 병도 보이고, 실패도 보이고, 오해도 보이고, 경제적 어려움도 보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권력과 부도 눈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보이는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부활의 소망, 영원한 영광,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것들은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에는 실제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로 붙드는 능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이 말하듯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성도는 보이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는 질그릇 같은 자신을 보았지만, 그 안의 보배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그는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보았지만,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더 깊이 보았습니다. 그는 잠깐의 환난을 보았지만, 영원한 영광을 더 확실히 보았습니다.
결론: 질그릇의 약함 속에 나타나는 복음의 영광
고린도후서 4장은 복음 사역과 성도의 삶을 가장 깊고 아름답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낙심할 이유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오해했고, 몸은 약해졌고, 사역은 고난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받은 직분이 하나님의 긍휼에서 왔고, 복음의 빛이 하나님께서 마음에 비추신 영광이며,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보배가 담겨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우리에게 복음 사역자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전파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전해야 합니다. 성도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예수를 위하여 성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이 장은 고난의 신학을 가르칩니다. 성도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수 있고,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버림받지 않고, 망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자에게 예수의 생명도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장은 성도의 시선을 바꿉니다. 겉사람은 낡아집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현재의 환난은 잠시입니다. 장차 올 영광은 영원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흔적을 지니고 살지만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우리의 수고와 눈물과 인내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넘치게 하시고, 마침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