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장 강해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장 강해

장막 같은 인생과 영원한 집

고린도후서 5장은 고린도후서 4장의 마지막 고백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바울은 4장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4:18). 그리고 5장에 들어와 그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소망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이며, 부활의 몸이며, 주님과 함께 거하는 완성된 생명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 육체를 “땅에 있는 장막 집”이라고 부릅니다(고후 5:1). 장막은 임시 거처입니다. 이동 중에 잠시 머무는 집입니다.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영구 건물이 아니라, 바람과 비에 약하고 언젠가는 걷어야 하는 천막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육체와 현세적 생명을 장막에 비유합니다. 이 말은 육체를 멸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몸이 영원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은 소중하지만 연약합니다. 병들고, 늙고, 피곤하고, 마침내 무너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장막이 무너지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합니다(고후 5:1). 성도의 소망은 죽음 이후의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집(eternal house)은 단순히 천국의 건물만을 뜻한다기보다, 부활의 몸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생명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몸이 장막이라면, 장차 받을 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영혼만 몸에서 빠져나가 어딘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소망은 몸의 구속, 곧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혼과 몸을 가진 전인격으로 지으셨고, 마지막 날 그리스도 안에서 몸까지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

바울은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말합니다(고후 5:2). 여기서 탄식(groaning)은 불신앙의 불평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연약함 속에서 완성될 구원을 기다리는 성도의 깊은 갈망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만, 아직 완성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탄식합니다. 병든 몸 때문에 탄식하고, 죄와 싸우며 탄식하고, 죽음의 현실 앞에서 탄식하고, 세상의 악과 불의 앞에서 탄식합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소망의 탄식입니다. 바울은 벗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덧입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고후 5:4).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헬라 철학의 일부 경향은 몸을 영혼의 감옥처럼 여기며, 죽음을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소망은 몸을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 자체를 동경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기를 원합니다(고후 5:4).

“덧입는다”는 표현은 부활의 몸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죽을 몸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롭게 입혀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기독교 부활 신앙의 독특함입니다. 구원은 창조의 폐기가 아니라 창조의 회복입니다. 몸은 버려질 쓰레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대상입니다.

바울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고후 5:5). 성령(πνεῦμα, Spirit)은 장차 받을 영광의 보증입니다. 보증(ἀρραβών, guarantee)은 완성될 것을 미리 맛보게 하는 첫 지불금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장차 부활과 영광을 반드시 완성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은 미래 영광의 현재적 증거입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소망 때문에 “우리가 항상 담대하다”고 말합니다(고후 5:6). 담대함(confidence)은 상황이 편안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부활의 약속과 성령의 보증 때문에 생기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바울은 육체 안에 거하는 동안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고후 5:6). 이는 주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는 지금도 성령 안에서 주님과 교제합니다. 다만 아직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완성된 교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합니다(고후 5:7). 이 구절은 성도의 삶을 요약하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믿음(faith)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붙드는 것입니다. 보는 것(sight)은 눈앞의 현실과 감각적 증거만을 기준으로 사는 태도입니다.

성도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병이 있으면 치료해야 하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야 하며, 삶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보이는 현실만으로 인생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내 감정보다 크고,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보다 확실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말합니다(고후 5:8). 이것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음은 여전히 원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성도를 주님에게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몸을 떠난 성도는 주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소망 없는 자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

바울은 부활과 영원의 소망을 말한 뒤 곧바로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영원한 소망은 현실 도피를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삶을 더 거룩하고 진지하게 만듭니다.

성도의 목표는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사람의 칭찬도 아닙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윤리의 중심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때, 어떤 말을 할 때, 돈을 사용할 때, 사람을 대할 때, 사역을 감당할 때 성도는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리스도의 심판대(judgment seat of Christ)는 성도의 구원을 다시 불확실하게 만드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주님 앞에서 평가됩니다. 몸으로 행한 것, 곧 이 땅에서 실제로 살아낸 삶이 주님 앞에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삶에 거룩한 긴장을 줍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 행동, 섬김, 인내, 사랑, 헌신, 은밀한 동기까지 주님 앞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가볍게 살 수 없습니다. 오늘의 작은 순종도 영원의 빛 아래 있습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에 권면합니다

바울은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라고 말합니다(고후 5:11). 여기서 두려움(fear of the Lord)은 공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경외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권면했습니다. 복음 전도는 단순한 종교 홍보가 아닙니다. 영원과 심판과 구원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났다고 말합니다(고후 5:11).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모와 말재주와 추천서를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진실함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다시 추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자랑할 근거를 갖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고후 5:12). 이는 외모로 자랑하고 마음으로 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외모(appearance)는 겉으로 보이는 조건, 수사적 능력, 사회적 위신을 뜻합니다. 마음(heart)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과 복음의 중심을 뜻합니다.

참된 사역은 외모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말, 강한 인상, 큰 성과만으로 사역의 진실성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복음 사역자는 사람 앞에서 멋있어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의 중심 구절 중 하나는 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강권하다(συνέχω, compel/control)는 말은 붙들어 움직이게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움직인 근본 동력은 야망도, 죄책감도, 사람의 인정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love of Christ)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먼저 가리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고후 5:14).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옛 생명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이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어 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이것이 기독교적 삶의 전환입니다. 죄인의 삶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영광, 자기 안전, 자기 욕망, 자기 만족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삶의 중심이 바뀝니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삽니다. 신앙은 단순히 종교 활동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육체대로 알지 않는 새로운 시선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합니다(고후 5:16). 육신을 따라 안다는 것은 사람을 외적 조건, 세상적 기준, 인간적 이해관계로 판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 교회 일부 사람들은 바울을 육신의 기준으로 평가했습니다. 말이 약하다, 외모가 부족하다, 고난이 많다는 이유로 그의 사도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외모와 신분과 능력과 성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안에 역사하는가를 봅니다.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합니다(고후 5:16). 바울은 회심 전 예수님을 실패한 메시아, 십자가에 달린 저주받은 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그는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였고,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의 선언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인식 방식을 바꿉니다. 십자가를 알면 약함을 다르게 봅니다. 부활을 알면 죽음을 다르게 봅니다. 은혜를 알면 사람을 다르게 봅니다. 성도는 육체대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in Christ)은 바울 신학의 핵심 표현입니다. 성도는 단지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그의 의를 입고, 그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은 개인의 도덕적 개선보다 훨씬 깊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빛을 창조하셨듯이, 복음 안에서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죄와 사망 아래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옛 주인, 옛 정체성, 옛 죄의 지배, 옛 절망이 결정권을 잃었습니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소속, 새로운 목적, 새로운 소망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성도는 이 땅에서 여전히 죄와 싸웁니다. 완전히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바뀌었습니다. 성도는 더 이상 옛사람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화는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새 사람답게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합니다(고후 5:18).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간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화목(reconciliation)은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고후 5:18). 성도와 교회는 화목의 복음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단지 개인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세상에게 화목을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죄를 없는 것처럼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 죄를 돌리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복음의 법정적 은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죄로 다루십니다. 그러나 그 죄를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를 돌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화목의 근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신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말합니다(고후 5:20). 사신(ambassador)은 왕의 권위를 위임받아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신의 임무는 자기 의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자기 사상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화목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고후 5:20). 복음 전파는 인간의 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간절히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이 권면은 복음의 핵심 초청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종교적 관심을 가지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대와 독립과 죄를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성공은 결국 공허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생명을 얻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죄로 삼으심

고린도후서 5장의 마지막 절은 복음의 심장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는 죄를 경험적으로 짓지 않으셨고, 죄의 오염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실제로 죄인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는 속죄 제물로 세워지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책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로워져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교환(great exchange)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는 죄 없으신 분으로서 죄인을 위해 죄의 자리에 서셨고, 우리는 죄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깊은 복음은 없습니다.

결론: 주를 위하여 사는 새 창조의 사람

고린도후서 5장은 성도의 현재와 미래, 죽음과 부활, 심판과 사명, 새 창조와 화목의 복음을 장엄하게 보여 줍니다. 성도의 현재 몸은 장막과 같습니다. 무너질 수 있고, 약하고, 잠시 머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성도는 죽음을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보증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몸으로 있든지 떠나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삶의 중심 동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삽니다. 복음은 삶의 주인을 바꿉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여김을 받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장막 같은 인생을 영원한 집의 소망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 보는 것으로만 행하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사는가? 나는 사람을 육신대로 판단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눈으로 보는가?

성도는 죽음 너머의 소망을 가진 사람이며, 오늘 주를 기쁘시게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화목의 말씀을 맡은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이 사명을 품고 사는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증언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복음의 초청을 계속 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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