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장 강해, 지금은 은혜 받을 때
고린도후서 6장 강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 6장은 고린도후서 5장의 마지막 권면과 이어집니다. 바울은 앞장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외쳤습니다(고후 5:2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고후 5:21).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그 은혜 앞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바울은 6장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고후 6:1).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는 표현은 바울의 사역 이해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기 힘으로 교회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부름받아 쓰임받는 동역자입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섬기는 종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은 매우 엄중합니다. 은혜(χάρις, grace)는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 은혜에 합당한 회개와 순종과 거룩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은혜는 방종의 허락이 아닙니다. 은혜는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은사를 받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분열과 교만과 세속성의 위험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바울은 이사야 49장 8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 말한 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고후 6:2).
이사야 49장은 여호와의 종을 통한 구원의 회복을 말하는 본문입니다. 바울은 그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현재적 요청을 합니다. 사람은 은혜를 뒤로 미루려 합니다. “나중에 믿겠다. 나중에 회개하겠다. 나중에 순종하겠다. 나중에 하나님께 돌아가겠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지금입니다. 은혜의 초청은 오늘 들을 때 응답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도 이 말씀은 중요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 해도 회개와 순종을 미루기 쉽습니다. 용서해야 할 일을 미루고, 끊어야 할 죄를 미루고, 시작해야 할 섬김을 미루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음을 미룹니다. 그러나 은혜는 오늘 우리를 부릅니다. 오늘 말씀 앞에 서고, 오늘 돌이키고, 오늘 순종해야 합니다.
사역에 거리낌이 없게 하려 함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라고 말합니다(고후 6:3). 바울의 관심은 자기 평판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복음의 직분이 비방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사역자의 삶이 복음의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복음은 진리이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복음의 신뢰성을 흐릴 수 있습니다. 물론 사역자의 약점 때문에 복음 자체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역자의 탐욕, 거짓, 교만, 부도덕, 무책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자기 삶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바울은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담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서 복음을 설명하거나 가릴 수 있습니다. 말로는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삶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는 삶
바울은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라고 말합니다(고후 6:4). 여기서 자천한다는 말은 자기 자랑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과 사역의 열매로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추천서나 외적 자격증보다 자신의 고난과 인내와 순전함으로 사도직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먼저 “많이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6:4). 인내(ὑπομονή, endurance)는 바울 사역의 핵심 표지입니다. 참된 사역자는 어려움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꾼인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성공과 편안함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의 인내로 증명되었습니다.
바울은 환난, 궁핍, 고난을 언급합니다(고후 6:4). 환난은 외부에서 밀려오는 압박이고, 궁핍은 필요한 것이 부족한 상태이며, 고난은 삶 전체를 짓누르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 현실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섰습니다.
이어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 자지 못함, 먹지 못함을 말합니다(고후 6:5). 이것은 바울의 사역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육체적 폭력도 당했고, 감옥에 갇혔으며, 군중의 소동을 겪었고, 밤을 새우며 수고했고, 굶주림도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편안한 종교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에 복음의 흔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순결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일꾼이 지녀야 할 내적 성품을 말합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라고 합니다(고후 6:6).
깨끗함(purity)은 도덕적 순결과 동기의 순전함을 포함합니다. 사역자는 겉으로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삶이 깨끗해야 합니다. 특히 돈, 성, 권력의 문제에서 깨끗함은 사역의 신뢰성과 직결됩니다.
지식(knowledge)은 복음의 진리를 아는 바른 이해입니다. 열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오래 참음(patience)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사람 때문에 아플 때가 많습니다. 오해받고, 기다려야 하고, 반복되는 연약함을 견뎌야 합니다. 오래 참음이 없으면 사역자는 사람을 빨리 정죄하거나, 반대로 쉽게 냉소에 빠집니다.
자비함(kindness)은 부드러운 긍휼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사람을 함부로 부수지 않는 마음입니다.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자비를 잃으면 차가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의 일꾼은 진리와 자비를 함께 품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화”를 말합니다(고후 6:6). 사역은 인간의 성품 훈련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은 사역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말씀에 능력을 주시며, 성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거짓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사역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거짓 사랑도 있습니다. 사람을 이용하는 사랑, 인정받기 위한 친절, 겉으로만 웃는 위선적 사랑이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없는 사랑으로 사역했습니다. 참된 사랑은 진실하고, 오래가며, 상대의 유익을 구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한다고 말합니다(고후 6:7). 하나님의 일꾼은 두 가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word of truth)과 하나님의 능력(power of God)입니다. 말씀 없는 능력 추구는 위험하고, 능력 없는 말만의 사역은 메마릅니다. 바울은 진리를 전했고, 하나님은 그 진리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는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라고 말합니다(고후 6:7). 의의 무기(weapons of righteousness)는 영적 싸움의 도구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에 무기를 들었다는 것은 방어와 공격, 모든 방향에서 의로 무장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혈과 육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거짓과 죄와 어둠에 맞서 진리와 의와 믿음으로 싸웁니다.
바울의 사역은 세상적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작, 폭력, 정치적 술수, 인간적 과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의의 무기로 싸웠습니다. 오늘 교회도 이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이기려 하면 복음의 능력을 잃습니다.
영광과 욕됨 사이에서
바울은 사역자의 삶이 역설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고후 6:8). 어떤 사람은 바울을 존경했고, 어떤 사람은 그를 비방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복음의 사도로 영광을 받았고, 어떤 곳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욕을 먹었습니다.
사역자는 사람의 평가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말씀을 전해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은 반발합니다. 같은 삶을 살아도 어떤 사람은 존중하고, 어떤 사람은 오해합니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중심은 사람의 평판에만 묶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가가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라고 말합니다(고후 6:8). 사람들은 바울을 속이는 자로 몰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라고 합니다(고후 6:9). 세상적으로는 이름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알려진 자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고후 6:9). 바울은 죽음에 가까운 고난을 겪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징계를 받는 자처럼 보였으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들려 있었습니다.
근심하나 항상 기뻐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 사역자의 역설을 말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는 말은 감정의 이중성을 잘 보여 줍니다. 성도는 근심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도 교회 때문에 근심했고, 고난 때문에 아팠고,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 속에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상황이 좋아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깊은 기쁨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말도 놀랍습니다. 바울은 물질적으로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습니다. 참된 부요는 돈만이 아닙니다. 죄 사함, 하나님과의 화목, 영원한 생명, 성령의 위로, 부활의 소망이야말로 참된 부요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보여 줍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바울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가 그의 주님이시며, 성령이 그의 보증이시고, 영원한 나라가 그의 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넓히라는 권면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직접 호소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라고 말합니다(고후 6:11). 바울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이 좁아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고후 6:12). 바울이 그들을 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바울을 향해 닫혀 있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의 영향, 오해, 자존심, 세속적 기준이 그들의 마음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합니다(고후 6:13).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화해 요청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사도와 교회가 바르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마음이 좁아지면 은혜를 받아도 의심하고, 사랑을 받아도 왜곡하며, 진리를 들어도 반발합니다. 마음을 넓힌다는 것은 복음의 사랑 안에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역자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음을 넓히라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상처 때문에 마음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마음이 닫힐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을 넓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셨기에, 우리도 진리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바울은 이어서 강한 권면을 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 이 말씀은 종종 결혼 문제에 적용되지만, 본문에서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고린도 교회가 우상 숭배와 세속적 가치관과 거짓 사역의 영향에 다시 묶이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멍에(yoke)는 두 짐승이 함께 짐을 끌도록 연결하는 도구입니다. 멍에를 함께 멘다는 것은 같은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깊이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성도가 믿지 않는 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신앙의 정체성을 손상시키는 깊은 결합입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우상과 같은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됩니다. 친구, 사업, 결혼, 가치관, 문화적 습관에서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결합이 있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사적인 취향이 아니라 삶의 주권 문제입니다.
바울은 다섯 가지 대조를 제시합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겠느냐고 묻습니다(고후 6:14-16). 이 질문들의 답은 분명합니다. 함께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의(righteousness), 빛(light), 그리스도(Christ), 믿는 자(believer), 하나님의 성전(temple of God)이 한편에 있고, 불법(lawlessness), 어둠(darkness), 벨리알(Belial), 믿지 않는 자(unbeliever), 우상(idols)이 반대편에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어둠과 우상의 질서에 자신을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후 6:16). 성전(ναός, temple)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건물에만 거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십니다.
바울은 구약의 여러 약속을 엮어 말합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이것은 언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성도의 거룩은 바로 이 임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상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큰 위로이면서 동시에 엄중한 책임입니다. 위로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러나 책임인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우상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바울은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말합니다(고후 6:17). 이것은 세상과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와 우상 숭배와 불의한 가치관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로 있음(separation)은 교만한 고립이 아닙니다. 거룩한 구별입니다. 성도는 사람을 멸시해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구별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 사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에 동화되지 않음으로 세상에 참된 빛을 비추라는 뜻입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말씀도 우상 숭배와 죄의 오염을 경계하는 표현입니다. 고린도는 우상 문화와 성적 타락과 세속적 성공주의가 강한 도시였습니다. 그 안에서 성도는 매우 쉽게 타협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에 자신을 넘기지 말라.
내가 너희 아버지가 되리라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마무리합니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후 6:17-18).
거룩한 분리는 단지 금욕적 부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영접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을 자녀로 삼으십니다. 성도는 세상과 결별함으로 공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능하신 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고, 외로워질 것 같고, 뒤처질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아버지가 되겠다.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이 약속이 성도의 거룩을 가능하게 합니다.
거룩은 단지 “하지 말라”의 목록이 아닙니다. 거룩은 소속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에게 속한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결론: 은혜를 받은 자답게 거룩하게 살라
고린도후서 6장은 은혜와 사역과 거룩을 함께 보여 줍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이고,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은혜는 미루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응답해야 하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고난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환난과 궁핍과 매 맞음과 수고 속에서도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성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합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우상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 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삶은 복음의 직분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가? 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꾼답게 인내하고 있는가? 나는 마음을 좁히지 않고 복음 안에서 넓히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성전답게 우상과 세속의 멍에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또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멍에를 벗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서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삶이며, 지금 구원의 날을 사는 성도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