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8장 강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사람들
고린도후서 8장 강해
은혜로 시작되는 헌금의 신학
고린도후서 8장은 헌금, 구제, 연보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단순히 “돈을 내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말하면서, 헌금의 중심을 은혜(χάρις, grace)에 둡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는 “은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바울에게 연보는 단순한 재정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성도들을 돕도록 권면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구제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방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민족과 지역과 계층을 넘어 하나 됨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이 연보를 시작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이 지연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억지로 압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게도냐 교회의 본을 소개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제시하며, 사랑의 진실함을 시험하듯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헌금을 율법적 부담이 아니라 복음적 은혜의 열매로 설명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알린다고 말합니다(고후 8:1). 여기서 놀라운 것은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을 그들의 선행이나 능력으로 먼저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헌금은 인간의 넉넉함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헌금은 은혜를 받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게도냐 지역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같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고후 8:2).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습니다(고후 8:2).
이 표현은 복음의 역설을 보여 줍니다. 세상적 계산으로는 가난하면 줄 수 없습니다. 환난이 많으면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인간의 계산을 넘어섭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가진 것이 많아서 드린 것이 아니라, 은혜가 커서 드렸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풍요의 부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헌금의 크기는 단지 액수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부유한 사람이 많은 것을 드릴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적은 것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은혜에서 나온 자원함인가, 사랑에서 나온 헌신인가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을 귀히 여기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막 12:41-44).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한 사람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다”고 증언합니다(고후 8:3). 여기서 “자원함”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헌금은 강제 징수가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자기 형편을 핑계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힘대로 드렸고, 심지어 힘에 지나도록 드렸습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과시나 감정적 충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들의 마음이 복음 안에서 열려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의 고난을 자기 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였다”고 말합니다(고후 8:4). 보통 헌금은 요청받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성도들은 오히려 참여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에게 연보는 부담이 아니라 특권이었습니다.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은혜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헌금의 마음입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단순한 지출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거룩한 참여로 보는 마음입니다. 헌금의 참된 영성은 “내 돈이 줄었다”가 아니라 “내가 은혜의 일에 참여했다”는 기쁨에서 드러납니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이것이 헌금 신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먼저 자신입니다.
성경적 헌금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의 재정적 표현입니다. 사람이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돈만 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헌금은 자기 의, 체면, 거래, 종교적 의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주께 드린 사람의 헌금은 예배가 됩니다. 그는 돈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자신도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는 말은 로마서 12장 1절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부만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원하십니다. 시간, 몸, 마음, 재능, 재물, 관계, 미래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헌금은 그 전체 헌신의 한 부분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울과 동역자들에게 자신을 주었습니다(고후 8:5). 이는 복음 사역의 질서 안에 자신들을 맡기고, 공동체적 책임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참된 은혜는 하나님께만 드린다고 말하면서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을 섬깁니다.
은혜의 일을 끝까지 완성하라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이 은혜의 일을 완성하게 하라고 권했습니다(고후 8:6). 고린도 교회는 이 일을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시작한 선한 일을 끝까지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시작보다 완성이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감동은 빨리 오지만 지속은 어렵습니다. 좋은 결심은 쉽게 하지만 끝까지 책임지는 일은 어렵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처음에는 연보에 열심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지연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은혜의 일을 중단하지 말고 완성하라고 합니다.
헌금과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적 감정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준비하고 실행하고 끝까지 감당하는 데는 믿음의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감정의 크기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순종을 보십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선한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풍성한 고린도 교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하다”고 말합니다(고후 8:7). 고린도 교회는 은사와 지식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고, 영적 은사도 많았고, 사도 바울을 향한 사랑도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 말합니다.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여기서 “이 은혜”는 연보의 은혜, 곧 구제 헌금에 참여하는 은혜를 뜻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믿음과 말과 지식에만 풍성하지 말고, 실제 섬김과 나눔에도 풍성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말씀 지식이 풍성합니다. 어떤 성도는 기도도 많이 하고, 신학적 이해도 깊고, 말도 잘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제 나눔과 섬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 말, 지식, 사랑이 연보의 은혜로 연결되기를 원했습니다. 참된 영성은 주머니와 시간과 삶의 실제 영역까지 변화시킵니다.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일
바울은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고후 8:8). 그는 사도적 권위로 강제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헌금은 억지가 아니라 사랑의 열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통해 “너희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고후 8:8). 여기서 헌금은 사랑의 시험대가 됩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필요 앞에서 나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가 사랑의 진실성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배고픈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 따뜻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면서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공허합니다(약 2:15-16).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말과 감정의 사랑을 넘어 실제적 사랑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헌금을 경쟁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를 예로 들지만, 고린도 교회를 부끄럽게 하여 억지로 돈을 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은혜가 은혜답게 흐르기를 원합니다. 헌금은 비교가 아니라 사랑의 진실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부요하신 자가 가난하게 되심
고린도후서 8장의 중심 구절은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바울은 헌금의 가장 깊은 근거를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찾습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본보다 더 근본적인 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었습니다. 여기서 부요함은 단순한 물질적 부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늘의 영광과 권세와 존귀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는 성육신(incarnation)과 십자가의 낮아지심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낮아지셨고, 비우셨고, 고난받으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고후 8:9).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 의롭다 하심, 하나님과의 화목, 성령의 선물,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부요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나눔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에 대한 응답입니다.
헌금은 복음의 모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를 위해 우리의 것을 나눕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 풍요를 움켜쥐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복음은 사람의 손을 펴게 합니다.
원함과 완성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일 년 전에 이 일을 시작했고, 원하기도 먼저 했다고 말합니다(고후 8:10). 고린도 교회는 이 연보에 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 마음을 실제 완성으로 이어 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고후 8:11).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첫째, 마음의 원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원함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좋은 마음만 있고 실제 순종이 없다면 온전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많은 일이 이 지점에서 멈춥니다. 기도해야겠다는 마음, 용서해야겠다는 마음, 섬겨야겠다는 마음, 드려야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마음에 원하던 것을 완성하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마음을 움직이고, 순종은 그 마음을 삶으로 드러냅니다.
또한 바울은 “있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고후 8:11). 이는 자기 형편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이어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합니다(고후 8:12). 헌금의 기준은 억지와 과시가 아니라 자원함과 형편에 맞는 신실함입니다.
균등하게 하려 함입니다
바울은 연보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고후 8:13).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무리하게 가난해져서 다른 사람만 편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적은 균등함(equality)입니다.
여기서 균등함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산을 가져야 한다는 기계적 평등이 아닙니다. 성도의 필요가 채워지는 복음적 상호 책임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넉넉한 것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고,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다른 이들의 넉넉함이 고린도 교회의 부족을 채울 수 있습니다(고후 8:14).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안의 상호성입니다.
교회는 독립된 개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한 몸입니다. 한 지체가 부족하면 다른 지체가 돕습니다. 한 지역 교회가 어려우면 다른 교회가 함께 짐을 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한 주님을 섬기고, 한 성령을 받았으며, 한 몸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출애굽기의 만나 사건을 인용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5; 출 16:18).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고,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 모두 필요를 채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급이 공동체 안에서 탐욕이 아니라 신뢰와 나눔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디도의 열심과 동역자들
바울은 이제 연보를 실제로 관리할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디도입니다.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고후 8:16). 디도는 단지 바울의 심부름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진심 어린 열심을 가진 동역자였습니다.
디도는 바울의 권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고린도 교회로 갔습니다(고후 8:17). 참된 동역자는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자원하여 섬깁니다. 디도의 열심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또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형제”를 함께 보낸다고 말합니다(고후 8:18). 이 형제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러 교회에서 인정받는 신실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이 은혜의 일을 맡도록 택함받았습니다(고후 8:19).
바울은 또 다른 형제도 함께 보냅니다. 그는 여러 일에 간절함이 입증된 사람이며, 고린도 교회를 향해 큰 신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고후 8:22). 이렇게 바울은 디도와 두 형제를 함께 보내어 연보를 관리하게 합니다. 이는 교회 재정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위해 매우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선한 일에도 조심함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고후 8:20).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오해의 여지를 줄이려 했습니다.
그는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고후 8:21). 이 구절은 교회 재정과 사역 행정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선한 일은 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과정이 흐릿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은 거룩한 일이기 때문에 더 투명하고, 더 신중하고, 더 정직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였지만 혼자 돈을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교회가 인정한 형제들을 세웠고, 동역자들과 함께 이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재정의 투명성을 위한 지혜입니다. 사람의 신뢰는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말씀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헌금과 재정은 은혜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책임의 영역입니다. 투명한 보고, 공동의 검증, 정직한 사용, 사적인 유용의 차단은 영적이지 않은 일이 아니라 매우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은 사람 앞에서도 신뢰롭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대표
바울은 디도를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고후 8:23). 또 함께 가는 형제들을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고후 8:23). 여기서 “사자”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 messenger)입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권위의 사도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들의 대표로 보냄받은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표현은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신실한 동역자들, 교회의 신뢰를 받아 은혜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불립니다. 그들의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과 복음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재정 관리, 구제 사역, 전달, 행정, 조율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역이 강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맡은 일을 감당하고, 성도의 필요를 섬기고, 교회 간의 사랑을 연결하는 일도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사랑의 증거를 보이라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고후 8:24).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실제 연보를 통해 사랑을 증명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랑은 보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압박하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를 실제로 나타내도록 격려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자랑했습니다. 이제 고린도 교회는 그 자랑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말뿐이 아님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교회는 사랑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말에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의 고통을 보고 실제로 돕는 손, 어려운 교회를 위해 마음을 여는 헌신, 형제의 필요를 내 일처럼 여기는 책임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사랑이 재정과 연결될 때 얼마나 실제적인 신앙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론: 헌금은 은혜를 받은 사람의 복음적 응답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헌금에 관한 장이지만, 그 중심은 돈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본을 통해 가난 속에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 보여 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넉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고, 그 결과 성도 섬기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사랑에 풍성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연보의 은혜에도 풍성하기를 원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말과 지식에 머물지 않고 실제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며, 헌금은 그 사랑의 진실함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헌금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명령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부요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고후 8:9). 성도의 나눔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대속적 사랑을 닮아가는 복음적 응답입니다.
또한 이 장은 교회 재정의 투명성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거액의 연보를 혼자 다루지 않고, 교회가 인정한 동역자들과 함께 처리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했습니다(고후 8:21). 선한 목적은 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헌금을 단순한 의무나 부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헌금은 은혜의 참여이며, 성도 섬김이며, 사랑의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사람은 자신의 소유도 주님의 뜻 안에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눔을 통해 교회는 한 몸임을 드러내고, 가난한 자는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