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장 강해

고린도전서 1장 강해

거룩하게 부름받은 교회

고린도전서 1장은 사도 바울의 문안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고전 1:1). 이 짧은 인사 안에는 바울의 사도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추천이나 자신의 열심으로 사도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부름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권면과 책망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사도적 권위에서 나옵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고전 1:2).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고린도 교회”가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장소에 속한 공동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상업과 문화, 철학과 우상숭배, 성적 방종과 사회적 경쟁심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곳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이 도시의 문화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 고린도 교회는 실제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열, 음행, 송사, 은사 남용, 성찬의 왜곡, 부활 신앙의 혼란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그들은 문제 많은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부름받은 성도입니다.

이것이 복음적 권면의 순서입니다. 바울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기 전에 성도의 신분을 먼저 확인시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자기 개선에서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거룩해지기 위해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장의 첫 부분은 교회론의 기초를 세웁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거룩함의 근거입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에 있으나 고린도의 정신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은혜로 세워진 공동체

문안 이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로 이어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4).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먼저 감사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고린도 교회의 성숙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말과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1:5).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말씀을 말하는 능력도 있었고, 지식을 추구하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은사들이 사랑과 질서 안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비극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은사가 많았으나 십자가의 정신으로 다스려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고전 1:7).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현재의 문제 속에서만 보지 않고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바라봅니다. 성도는 현재의 연약함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현재의 부족함과 장래의 영광 사이를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고전 1:8). 이것은 성도의 견인이 인간의 의지에만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말합니다(고전 1:9).

여기서 “교제”는 단순한 친교가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지 종교 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있는가? 우리의 말과 행동, 예배와 은사, 판단과 관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오는가?

고린도전서 1장의 감사 부분은 교회의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희망은 사람의 능력, 지도자의 카리스마, 조직의 세련됨, 은사의 풍성함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희망은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은혜를 주셨고,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세워지는 공동체입니다.

분열된 교회를 향한 권면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분열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10). 이것은 고린도전서 전체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분열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말이 있었습니다(고전 1:12). 여기서 바울, 아볼로, 게바는 모두 복음의 일꾼입니다. 문제는 지도자들이 아니라,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성도들의 태도였습니다.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야 하지만, 사람에게 속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사역자는 귀하지만, 말씀의 사역자가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날카롭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 1:13). 이 질문은 교회의 분열을 십자가 앞에 세웁니다.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근거는 인간적 취향이나 조직적 합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가? 누구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는가? 답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오늘날 교회에도 깊은 경고를 줍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은 설교자, 교단, 신학 노선, 예배 스타일, 특정 인물, 특정 사역을 중심으로 쉽게 갈라집니다. 물론 진리에 관한 분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적 자랑과 편당심에서 나오는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교회는 다양성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다양성은 십자가 아래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까지 말합니다(고전 1:14-16). 이는 세례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는지를 가지고 자랑하거나 편을 가르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세례의 본질은 집례자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성도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보다,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를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교회 일치의 근거를 분명히 가르칩니다. 교회는 인간 지도자의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 됨은 단순한 친목이나 조직 유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붙드는 데서 옵니다.

십자가의 도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기보다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이라고 밝힙니다(고전 1:17).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근본 문제를 드러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인간의 지혜와 수사학, 철학적 능력, 말의 세련됨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말재주로 포장될 때 오히려 그 본질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고전 1:18).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의 핵심 구절입니다. 십자가는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킵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패배와 수치, 무능과 실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 세계에서 십자가는 아름다운 종교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 도구였습니다. 로마 시민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고, 반역자나 노예 같은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 방식으로 선포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자리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폐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19). 인간은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지혜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지혜는 귀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 그 지혜는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 교만이 됩니다. 세상은 지혜를 통해 하나님께 올라가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인에게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고전 1:21). 여기서 “전도의 미련한 것”은 전도 행위 자체가 어리석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이 어리석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선포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설교와 복음 전도의 본질을 가르칩니다. 설교는 인간의 지적 만족을 위한 강연이 아닙니다. 설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십자가를 희석하면, 교회는 잠시 사람들의 관심을 얻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십자가가 약해 보일수록 교회는 세상의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십자가가 사라지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유대인의 표적과 헬라인의 지혜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철학적 요구를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합니다(고전 1:2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온다면 정치적 승리와 기적적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는 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철학적 논리와 수사학적 아름다움, 인간 이성의 세련됨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구원자는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고, 그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고, 그 죽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은 헬라적 지성에는 비합리적이고 조악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23). 바울은 유대인의 요구에 맞추어 복음을 표적 중심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헬라인의 취향에 맞추어 복음을 철학적 체계로 대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사도적 설교의 중심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3-24). 같은 십자가를 보지만 반응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걸려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비웃고,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그 차이는 인간의 타고난 지성이나 종교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옵니다.

이 부분은 복음이 인간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상품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구원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논리적 설명만을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동을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과 번영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기대에 맞추어 구원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말씀은 복음의 역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고전 1:25). 물론 하나님께 실제로 어리석음이나 약함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방식이 인간 최고의 지혜보다 지혜롭고, 인간이 보기에 약해 보이는 하나님의 방식이 인간 최고의 능력보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세상 앞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변명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도덕 철학이 될 수는 있어도 복음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설교는 좋은 말일 수는 있어도 구원의 능력은 아닙니다.

미련한 자를 택하신 하나님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말합니다(고전 1:26). 이것은 자기 성찰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고전 1:26).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 지식인이나 유력자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의 중심이 세상의 기준에서 탁월한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고전 1:27). 또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셨습니다(고전 1:28).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 방식이 인간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 지혜로운 자, 유명한 자, 가진 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하고 낮은 자들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함 자체를 낭만화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지나 무능, 가난이나 낮음이 자동으로 영적 우월성을 가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핵심은 인간이 자랑할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랑을 제거하시고,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임을 드러내십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인간의 죄성은 끊임없이 자랑할 근거를 찾습니다. 지식이 있으면 지식을 자랑하고, 은사가 있으면 은사를 자랑하고, 경건이 있으면 경건을 자랑하고, 고난을 겪으면 고난까지 자랑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육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의로움과 지혜와 능력이 모두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된 이유도 바로 자랑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자랑했고, 어떤 사람은 아볼로를 자랑했고, 어떤 사람은 게바를 자랑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더 영적인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인간적 자랑을 십자가 앞에서 해체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랑이 커지면 분열이 생기고, 십자가가 커지면 겸손과 하나 됨이 생깁니다.

이 단락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신앙 연수, 직분, 지식, 헌신, 사역 경험, 교단 배경, 신학적 입장, 영적 체험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랑의 근거가 되는 순간, 은혜는 왜곡됩니다. 성도의 자랑은 오직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지혜

바울은 성도의 구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시 밝힙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합니다(고전 1:30).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자신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30). 이 한 구절은 복음의 풍성함을 압축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계시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참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입니다. 죄인은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 종교적 열심, 철학적 성찰, 사회적 선행만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이는 성도가 자기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성화는 인간의 자기 수양만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고, 또한 그 거룩함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나타나야 할 열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함입니다. 여기서 구원함은 최종적 속량과 완성을 바라봅니다. 성도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 구원의 길을 걸으며, 장차 완전한 구원을 누릴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성도의 처음과 끝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결론짓습니다(고전 1:31).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의 결론입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주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은사를 자랑하지 말고 은혜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자랑이 죽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세우는 교회

고린도전서 1장을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 중 가장 먼저 분열을 다룹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싸우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열의 뿌리를 더 깊이 파고듭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교회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말 잘하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신을 구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모든 자랑을 무너뜨립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를 심판하고, 인간의 교만을 낮추며, 인간의 공로를 제거합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구조는 매우 선명합니다. 첫째, 바울은 성도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고전 1:1-3). 둘째,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감사합니다(고전 1:4-9). 셋째, 그는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그리스도께서 나뉘지 않으셨음을 선포합니다(고전 1:10-17). 넷째, 그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밝힙니다(고전 1:18-25). 다섯째, 그는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약한 자를 택하셔서 인간의 자랑을 폐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1:26-31).

이 구조 속에서 고린도전서 1장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십자가가 사라지면 교회는 인간 집단이 됩니다. 십자가가 약해지면 교회는 사람을 자랑하게 됩니다. 십자가가 중심에 서면 성도는 겸손해지고, 교회는 하나 되며, 복음은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오늘날 교회도 고린도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자랑하고, 말의 세련됨을 추구하며, 숫자와 영향력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기 쉽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보다 프로그램을 의지하고, 복음보다 전략을 신뢰하며, 은혜보다 성과를 자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결론: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장은 교회를 향한 깊은 복음적 교정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책망하지만, 그 책망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누구에게 속했는가? 누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너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성도의 자랑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설교의 중심도 그리스도이고, 예배의 중심도 그리스도이며, 교회 일치의 근거도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인간적 자랑으로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는 단순히 존경받는 스승이나 위대한 종교 창시자가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는 성경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능력을 잃은 종교 기관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장은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자랑을 내려놓고, 우리의 지혜를 내려놓고, 우리의 편당심을 내려놓고,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고전 1:31). 참된 교회는 사람의 이름이 높아지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곳입니다. 참된 성도는 자기 의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참된 설교는 인간의 감탄을 끌어내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마지막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이것이 교회의 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 위에 선 삶의 길입니다. 교회가 이 진리를 붙들 때, 분열은 치유되고, 은사는 질서를 찾으며, 성도는 겸손해지고, 복음은 다시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고린도전서 1장은 그래서 문제 많은 교회를 향한 책망이면서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를 십자가 앞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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