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장 강해

 

고린도전서 2장 강해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한 설교

고린도전서 2장은 고린도전서 1장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다루며, 그 근본 원인이 인간의 지혜와 자랑에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 아볼로, 게바 같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편을 나누었고, 말의 지혜와 세상의 기준으로 사역자를 평가했습니다(고전 1:12). 이에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했습니다(고전 1:18).

이제 2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 어떤 태도로 사역했는지를 회상합니다. 그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말합니다(고전 2:1). 여기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당시 헬라 세계가 높이 평가하던 수사학적 기교와 철학적 세련미를 가리킵니다. 고린도는 헬라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사람들은 웅변가의 말솜씨와 철학자의 논리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그런 방식으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을 감탄시키는 설교자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청중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종교 연설가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고전 2:2).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의 중심 구절입니다. 바울의 설교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였고, 더 구체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한 것은 다른 지식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능통했고, 유대교 전통을 깊이 알았으며, 당시 헬라 문화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그는 아덴에서 헬라 시인의 말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식 자체를 배척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의 말은 복음 사역의 중심과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지식도, 어떤 철학도, 어떤 수사학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와 신앙 교육도 이 지점에서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지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역사, 철학, 심리학, 문학, 사회학, 과학적 통찰도 보조적으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밀어내면 설교는 더 이상 성경적 설교가 아닙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야기, 지적인 만족을 주는 해석, 세련된 표현, 시대 분석은 필요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흐리게 한다면 본질을 잃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인간의 자랑을 꺾고,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며, 성도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세우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사라진 교회는 사람을 자랑하게 됩니다. 십자가가 약해진 설교는 인간의 지혜를 높이게 됩니다. 십자가가 중심에 서면 사람의 영광은 낮아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약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있을 때의 상태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말합니다(고전 2:3). 이것은 매우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고, 수많은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강력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영웅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사역자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확신했지만, 자기 자신을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었지만, 자기 육체의 강함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영적 역설입니다. 그는 담대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확신으로 담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했지만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했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는 표현은 복음 사역의 무게를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가벼울 수 없습니다. 설교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말잔치가 아닙니다. 설교는 영혼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 앞에서 행하는 거룩한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설교자는 자기 재능에 도취되지 않습니다. 청중을 장악하는 능력에 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 앞에서 먼저 떨고, 하나님 앞에서 먼저 낮아집니다.

바울은 이어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말합니다(고전 2:4). 여기서 바울은 말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해집니다. 설교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거부한 것은 인간의 설득 기술이 복음의 능력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작하는 웅변술이나 감정적 압박, 철학적 우월감으로 믿음을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설득된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흔들릴 때 함께 흔들립니다. 분위기로 생긴 믿음은 분위기가 사라지면 식습니다. 사람의 매력에 끌려 생긴 신앙은 그 사람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 말합니다(고전 2:5).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모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을 인간적 매력, 프로그램, 분위기, 성공담, 심리적 위로 위에 세우면 위험합니다. 그런 것들은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신앙의 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터는 하나님의 능력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와 성령의 역사 안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의 약함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인간적 약함을 제거하신 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약함 가운데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도 세상 눈에는 약함과 패배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도 역시 자신의 약함을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함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때로 약함은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만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약함 자체가 아니라, 그 약함 속에서 무엇을 붙드느냐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면 약함은 절망이 되지만, 십자가를 붙들면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온전한 자들에게 말하는 지혜

바울은 6절부터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말합니다(고전 2:6). 앞에서는 인간의 지혜를 거부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이제는 지혜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부한 것은 세상의 지혜이고,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온전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죄가 없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성령으로 복음을 깨닫고,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자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눈에는 십자가가 미련해 보이지만, 믿음으로 보는 자에게 십자가는 가장 깊은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단순한 초보 지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신앙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신학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말하는 지혜가 “이 세상의 지혜도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라고 말합니다(고전 2:6). 세상의 지혜는 시대마다 찬란해 보입니다. 제국은 강해 보이고, 철학은 깊어 보이고, 권력자는 영원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권세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무너지고 사라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합니다. 바울은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2:7).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졌던 지혜입니다. 감추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종교적 탐구가 만들어 낸 결론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비밀입니다.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는 표현은 구원의 계획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고전 2: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갑작스러운 실패가 아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와 로마 권력의 폭력으로 우연히 일어난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정하신 구원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십자가가 패배였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구원의 완성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지혜를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정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2:7). 성도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 다릅니다. 세상은 권력, 명예, 부, 지식, 영향력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낮아짐의 자리이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성도는 영광으로 부름받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수치로 끝나지 않고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인의 지혜 이해를 새롭게 합니다. 성경적 지혜는 단순히 삶의 요령이나 도덕적 판단력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지혜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지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아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의 흐름을 잘 읽는 사람만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지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고전 2:8). 여기서 “이 세대의 통치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관여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자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권세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혜롭고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고전 2:8). 이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눈에는 나사렛 출신의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로마의 법정에서는 사형수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신성모독자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분을 “영광의 주”라고 부릅니다.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은 기독교 복음의 신비를 압축합니다. 영광과 십자가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광은 높음이고 십자가는 낮음입니다. 영광은 찬란함이고 십자가는 수치입니다. 영광은 승리이고 십자가는 패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는 십자가가 곧 영광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사랑과 의, 거룩과 구원을 가장 깊이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의 무지는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인식이 아니라, 영적 분별과 관계적 인식을 포함합니다. 그들은 영광의 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 지혜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종교인은 자기 전통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며, 지식인은 자기 이성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 안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 방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듯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고전 2:9).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이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상상력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감각과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입니다.

이 말씀은 흔히 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으로도 이해되지만, 본문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구원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곧 십자가와 부활, 성령을 통한 계시, 성도가 누릴 영광의 비밀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 비밀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간의 추측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상상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과 성령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믿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찾아오신 복음입니다.

성령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의 깊은 것

바울은 10절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라고 합니다(고전 2:10). 인간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는 알 수 없던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단순한 감정적 감동이나 종교적 분위기가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고 말합니다(고전 2:10). 이 표현은 성령의 신성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스스로 통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다고 했으므로, 성령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신앙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2:11). 사람의 내면은 그 사람의 영 외에는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학과 성경 해석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문법, 역사, 배경, 원어, 문맥 분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영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령의 조명 없이는 그 영적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식은 본문을 분석할 수 있지만, 성령은 그 본문 앞에서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고전 2:12). 성도는 세상의 영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영은 교만, 자기 자랑, 경쟁, 욕망, 불신앙, 하나님 없는 지혜를 만들어 냅니다. 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주십니다. 세상이 미련하게 보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십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고전 2:12). 복음의 내용은 은혜입니다. 구원도 은혜이고, 믿음도 은혜이며, 성령의 깨닫게 하심도 은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단순히 뜨거운 감정이나 특별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이고, 십자가의 복음을 밝히 드러냅니다.

성령의 말로 전하는 복음

바울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고 말합니다(고전 2:13). 이것은 복음의 내용뿐 아니라 전달 방식도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함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인간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언어의 근원과 방향은 성령께 있었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고전 2:13). 이 말씀은 번역에 따라 “영적인 것은 영적인 사람들에게 설명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됩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영적 진리는 성령의 조명과 분별 안에서만 바르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복음은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실 때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설교자와 성경 교사에게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성실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성령께 의존해야 합니다. 성경 교사는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 역시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무관심하며, 어떤 사람은 반발합니다. 그 차이는 단순한 지능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 분별의 문제입니다.

바울의 말은 설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설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꾸미는 일이 아닙니다. 설교는 성령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설교자의 말이 성령의 말씀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설교자가 성령께서 계시하신 말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말의 홍수 속에 있습니다. 정보도 많고, 강의도 많고, 영상도 많고, 설교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많다고 진리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신 복음의 말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말, 감정을 자극하는 말,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는 말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시는 말, 죄인을 십자가 앞에 세우는 말, 하나님 은혜를 깨닫게 하는 말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들을 때도 분별해야 합니다. 그 말이 사람을 높이는가,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인간의 가능성을 과장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가?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가, 십자가를 장식처럼 주변에 두는가? 성령의 말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랑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

바울은 이제 두 종류의 사람을 대조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고전 2:14).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은 단순히 몸을 가진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육은 종종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연적 상태, 곧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타락한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종교적일 수도 있고 지적일 수도 있으며 도덕적으로 훌륭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일을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십자가의 복음은 자연인에게 미련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의와 자기 지혜를 붙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아무 공로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사람은 십자가를 불편해합니다.

둘째,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알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여기서 바울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능력의 문제를 말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성령의 조명 없이는 복음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적으로 학문이 깊지 않은 사람이라도 성령께서 눈을 열어 주시면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성령의 필요성을 가르칩니다. 타락한 인간은 단순히 조금 부족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감각이 어두워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교육이나 도덕 훈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가르침만으로 새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반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말합니다(고전 2:15). 여기서 신령한 자는 특별한 신비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사물을 봅니다. 그는 십자가를 미련하게 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봅니다. 그는 인간의 자랑을 성공으로 보지 않고 위험으로 봅니다. 그는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고전 2:15). 이 말은 신령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비판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가 교회의 권면이나 책망에서 자유롭다는 뜻도 아닙니다. 의미는 세상적 기준으로는 성령의 사람을 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령한 사람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삶, 자기 부인을 기뻐하는 삶, 보이지 않는 영광을 바라보는 삶은 세상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성도에게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줍니다. 위로는 세상이 성도의 믿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원래 세상 눈에 낯선 길입니다. 그러나 경고도 있습니다. 자신이 신령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권면을 거부하거나, 말씀의 판단을 받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신령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 앞에 더욱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성도

고린도전서 2장의 마지막 절은 놀라운 선언으로 끝납니다.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 묻습니다(고전 2:16). 이것은 이사야 40장 13절의 사상을 반영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스스로 파악하거나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듣는 자이지, 하나님 위에 서서 판단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2:16). 이것은 매우 담대한 고백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을 훔쳐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성품, 생각, 뜻, 가치관, 십자가의 정신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강함을 높이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은 십자가의 낮아짐을 귀히 여깁니다. 세상은 자랑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세상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은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줍니다. 세상은 지배하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은 섬깁니다.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것도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은사가 있었고 지식이 있었고 말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자랑이 되었고, 지식은 교만이 되었으며, 자유는 형제를 실족시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2장에서 성령의 지혜를 말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더 깊이 진단합니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제도만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합니다. 신앙생활의 성숙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 많아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직분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교회 활동이 많아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참된 성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은혜를 기억하며, 형제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말씀은 성도에게 영광스러운 신분을 알려 주는 동시에, 거룩한 책임을 부여합니다(고전 2:16).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답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답게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답게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지식의 장식품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결론: 성령 안에서 십자가를 아는 지혜

고린도전서 2장은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계시를 깊이 연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 2:2). 왜냐하면 성도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2:5).

이 장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첫째, 바울은 십자가 중심의 설교를 말합니다(고전 2:1-5). 둘째, 그는 세상의 지혜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를 설명합니다(고전 2:6-9). 셋째, 그는 그 지혜가 성령으로 계시된다고 가르칩니다(고전 2:10-13). 넷째, 그는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을 대조하며 성령의 분별을 강조합니다(고전 2:14-16).

고린도전서 2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 지혜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람은 십자가를 미련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눈을 열어 주시면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의와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혜를 구하되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또한 이 장은 설교자와 교회에게 중요한 원칙을 줍니다. 교회는 사람의 지혜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기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분위기나 설득 기술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 있는가? 우리는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지혜를 따라 살고 있는가?

고린도전서 2장은 오늘의 성도에게도 깊이 말합니다. 세상의 말은 화려하고, 시대의 지혜는 매력적이며, 인간의 자랑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입니다(고전 2:12). 우리는 육에 속한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분별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로 부름받았습니다(고전 2:16).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2장의 마지막 적용은 분명합니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교회와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따라 살게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2장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십자가의 지혜이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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