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5장 강해
고린도전서 5장 강해
교회 안에 들어온 심각한 죄
고린도전서 5장은 교회 안에 들어온 공개적이고 심각한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 바울은 주로 교회의 분열과 인간적 자랑, 지도자 숭배와 세상 지혜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5장부터는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윤리 문제로 들어갑니다. 그 첫 번째가 음행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라고 말합니다(고전 5:1).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죄를 소문으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 죄는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가 알고도 방치한 공개적 죄였습니다. 더구나 그 내용은 “어떤 사람이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고전 5:1). 이는 계모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구약 율법에서도 엄히 금지된 죄이며, 이방 사회에서도 수치스럽게 여겨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죄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5:1). 물론 고린도라는 도시는 성적으로 문란한 문화가 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이 죄가 그만큼 심각하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거룩해야 할 공동체인데, 오히려 세상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죄를 교회 안에서 방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죄의 심각성입니다. 현대 사회는 죄라는 말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개인의 선택, 사적 자유, 정서적 욕구라는 말로 죄의 문제를 희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죄라고 말합니다. 특히 성적 죄는 개인의 몸과 영혼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공동체의 거룩성을 훼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6:19). 그러므로 성도의 몸은 자기 욕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지체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5장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 사람의 죄만이 아닙니다. 바울이 가장 강하게 책망하는 것은 교회가 그 죄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죄를 보고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만했습니다. 이것이 5장의 핵심 문제입니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교회는 죄인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죄의 문제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죄를 정당화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이 은혜로 용서받고 변화되는 곳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품어야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를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은 바로 이 차이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슬퍼하지 않는 교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책망합니다(고전 5:2). 여기서 중요한 대조는 교만과 슬픔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죄가 드러났다면, 마땅히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애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만했습니다.
왜 그들은 교만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본문이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전체 문맥을 보면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와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풍성하다고 생각했습니다(고전 1:5-7). 또한 자유를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는 진리를 방종의 근거로 삼았을 수 있습니다. 또는 세상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적 죄를 가볍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만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신앙의 위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은혜를 말하면서도 거룩을 잃을 수 있습니다. 자유를 말하면서도 순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지식을 말하면서도 회개를 잃을 수 있습니다. 은사를 자랑하면서도 하나님의 두려움을 잃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사를 가졌지만, 죄 앞에서 애통하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마땅히 “통한히 여겨야” 했다고 말합니다(고전 5:2). 여기서 슬픔은 단순한 감정적 우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고, 공동체가 함께 아파하며, 회개와 정결을 구하는 거룩한 애통입니다. 성경적 애통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을 파괴하려 하지 않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지만 회복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죄 앞에서 가벼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 이 애통은 단지 개인적 슬픔만이 아니라 죄에 대한 영적 슬픔을 포함합니다. 교회가 죄 앞에서 애통할 때, 그 교회는 회복의 가능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죄 앞에서 무감각하고 오히려 자랑한다면, 그 교회는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말씀 앞에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혹시 세상의 기준을 따라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반대로 죄인을 정죄하는 데는 빠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함께 애통하는 마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냉혹한 정죄가 아니라 거룩한 슬픔입니다.
교회가 죄 앞에서 슬퍼하지 못하면 권징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권징은 분노나 체면 유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죄인의 회복과 공동체의 정결을 향한 애통에서 나와야 합니다. 애통 없는 권징은 폭력이 되기 쉽고, 권징 없는 애통은 감상에 그치기 쉽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은 교회가 죄 앞에서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를 먼저 가르칩니다.
교회의 권징과 그 목적
바울은 교회가 그 죄를 행한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서 내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고전 5:2). 이어서 자신은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으며, 이미 그 일을 행한 자를 판단했다고 말합니다(고전 5:3). 여기서 바울은 교회의 권징을 말합니다. 권징은 오늘날 교회에서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운 주제이지만, 성경은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로서 죄를 다루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말합니다(고전 5:4-5). 이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사탄에게 내준다”는 말은 그를 교회의 보호와 교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성령의 교제가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밖은 사탄의 영역, 곧 세상적 지배가 강하게 작용하는 곳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이 권징의 목적은 단순한 처벌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5:5). 이 말씀은 권징의 궁극적 목적이 회복과 구원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육신을 멸한다”는 것은 죄된 본성과 교만한 삶의 방식이 무너지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징은 죄인을 영원히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여 마지막 날에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적 권징은 복수도 아니고, 공동체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행정 조치도 아닙니다. 권징은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물론 고통스럽고 엄중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을 위험 속에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죄를 죄라고 말하고, 회개로 초대하며, 필요할 때는 단호한 조치를 취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8장에서 형제가 죄를 범할 때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8:15-17). 이것은 권징이 충동적이고 사적인 분노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단계적이고 공동체적이며 회복을 지향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바울의 권징 명령은 또한 교회의 권위를 전제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에 따라 죄를 판단하고 다룰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이 권위는 남용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과 사랑, 신중함과 겸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권위의 남용이 두렵다고 해서 권징 자체를 포기하면 교회는 거룩성을 잃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두 극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는 권징을 거의 하지 않으며 모든 죄를 개인의 문제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무책임입니다. 다른 하나는 권징을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여 사람을 억압하고 상처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폭력입니다. 성경적 권징은 진리와 사랑, 거룩과 회복이 함께 가는 길입니다.
적은 누룩의 위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태도를 다시 책망하며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고 말합니다(고전 5:6).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고전 5:6). 누룩은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작은 효모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문맥에 따라 긍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죄와 부패의 확산을 상징합니다.
바울의 강조점은 죄가 공동체 안에서 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죄처럼 보여도, 그것이 회개 없이 방치되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 사람의 죄가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교회의 영적 분위기와 거룩성, 말씀에 대한 태도, 성도들의 양심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전염성을 보아야 합니다. 죄는 고립되어 머물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들의 기준을 무너뜨립니다. “저 사람도 괜찮은데 나도 괜찮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퍼집니다. 죄에 대한 경계심이 약해지고, 회개 없는 삶이 정상처럼 여겨집니다. 결국 교회 전체가 죄에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마 자신들이 관대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관대함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보았습니다. 성경적 사랑은 죄를 덮어 주는 사랑이지만, 죄를 정당화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지만, 죄를 회개 없이 방치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거룩을 지키는 것은 배타적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적은 누룩”이라는 말은 작은 타협의 위험도 가르칩니다. 교회와 성도는 큰 죄 앞에서는 경계하지만, 작은 타협은 쉽게 허용할 때가 많습니다. 작은 거짓말, 작은 음란, 작은 미움, 작은 교만, 작은 분열의 말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 없이 반복되면 영혼을 둔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오염시킵니다. 죄는 항상 작게 시작하지만, 결코 작게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말합니다(고전 5: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체성과 명령의 순서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도는 거룩해지기 위해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정결은 완벽주의가 아닙니다. 교회가 죄 없는 사람만 모이는 곳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교회의 정결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되는 삶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은 교회의 품 안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는 공동체 안에서 정상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바울은 누룩의 비유를 유월절 신학으로 확장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5:7).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윤리적 정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근거로 교회의 거룩을 말합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고, 그 피 아래 있는 집은 심판을 넘어갔습니다(출 12장). 유월절 어린양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대속의 표지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유월절의 참된 성취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덕적 수준이나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의 심판을 지나가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성도의 삶을 어떻게 바꿉니까?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되었으므로,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근거가 아니라 죄에서 떠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우리를 사셨다면, 우리는 더 이상 묵은 삶의 방식에 머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말합니다(고전 5:8). 여기서 “명절을 지키자”는 말은 문자적으로 유대 절기를 계속 지키자는 뜻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성도의 삶 전체가 유월절적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전함과 진실함”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거룩의 성격입니다(고전 5:8). 순전함은 혼합되지 않은 깨끗함을 뜻합니다. 진실함은 거짓과 위선이 없는 정직함을 뜻합니다. 교회는 겉으로만 거룩한 척하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숨기고, 체면을 포장하고, 외형적 경건만 유지하는 것은 순전함과 진실함이 아닙니다. 참된 거룩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고린도전서 5장이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깨끗하게 살아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다”고 말합니다(고전 5:7). 성도의 거룩은 십자가에서 출발합니다. 십자가 없는 윤리는 율법주의가 되기 쉽고, 거룩 없는 십자가 이해는 값싼 은혜가 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성도의 거룩한 삶을 낳습니다.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죄와의 단절
바울은 이제 이전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쓴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고전 5:9).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말을 오해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고전 5:10). 만일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접촉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적 거룩이 세상과의 물리적 격리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성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이웃으로 살고,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모든 죄인과 접촉하지 않으려 한다면 복음 전도도 불가능해집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금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의 일반적 접촉이 아닙니다. 그는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고전 5:11). 여기서 핵심은 “형제라 일컫는 자”입니다. 곧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죄의 목록을 음행에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탐욕, 우상숭배, 모욕, 술 취함, 속여 빼앗음도 언급합니다(고전 5:11). 이것은 교회가 특정한 성적 죄만 문제 삼고 다른 죄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탐욕도 심각한 죄이고, 언어로 사람을 해치는 것도 죄이며, 술 취함과 속임도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입니다. 교회는 죄를 선택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은 당시 식탁 교제가 친밀한 교제와 공동체적 인정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고전 5:11). 회개하지 않는 죄를 행하면서도 형제로 인정받고 정상적 교제를 누리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잘못된 확신을 줄 수 있습니다. 권징은 그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깨닫게 하는 표시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가 죄를 정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사소한 허물에 대해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연약함이 있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죄를 짓느냐 마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느냐 아니면 고집스럽게 붙드느냐입니다. 회개하는 성도는 품고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형제라 하면서도 죄를 정당화하고 계속 그 안에 머문다면, 교회는 사랑의 이름으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대목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균형을 줍니다.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폐쇄적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거룩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하고, 교회 안에서 형제라 하면서 죄를 고집하는 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균형입니다.
교회 안의 판단과 하나님의 심판
바울은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고 말합니다(고전 5:12). 여기서 바울은 교회가 판단해야 할 영역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영역을 구분합니다. 교회는 세상 전체를 재판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한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형제라 불리는 사람들의 공개적이고 회개 없는 죄에 대해서는 교회가 책임 있게 판단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때로 세상의 죄에 대해서는 큰소리로 비판하면서, 정작 교회 안의 죄에 대해서는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순서가 잘못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의 악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 안의 죄를 방치하면서 세상만 책망한다면 위선이 됩니다. 교회의 거룩한 증언은 자기 정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라는 말씀은 교회의 한계를 인정하게 합니다(고전 5:13).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 모든 사람을 정죄하는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세상의 죄도 가볍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만 교회의 직접적 권징 대상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 불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명령합니다(고전 5:13). 이것은 신명기의 표현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악을 제거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거룩을 지켜야 했습니다. 바울은 신약 교회에도 공동체적 거룩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이지만, 그 은혜는 거룩을 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징의 목적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내쫓는 것은 영원한 저주 선언이 아니라 회개를 위한 엄중한 조치입니다. 실제로 고린도후서 2장에는 죄를 범한 자가 회개했을 때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확증하라는 권면이 나옵니다(고후 2:6-8). 이것이 고린도전서 5장의 권징과 함께 읽혀야 할 균형입니다. 권징의 목적은 배제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그러나 회복을 위해 때로는 엄중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의 판단은 언제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개인의 감정, 정치적 이해관계, 교회 내 권력 다툼, 체면 유지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판단은 겸손해야 합니다. 판단하는 사람도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침묵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죄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교회는 사랑과 두려움으로 바르게 말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권징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과거 권징의 남용과 상처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권징이 사람을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용이 있었다고 해서 성경적 원리 자체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더 성경적이고 더 겸손하며 더 회복 지향적인 권징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가 죄를 방치하면 사랑을 잃고, 교회가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면 은혜를 잃습니다. 성경은 거룩과 은혜를 함께 붙들라고 가르칩니다.
결론: 거룩을 회복하는 교회
고린도전서 5장은 오늘날 교회가 듣기 어려워하지만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 장은 교회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심각한 음행이 있었고, 교회가 그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했던 것을 책망합니다(고전 5:1-2). 그는 회개하지 않는 죄를 공동체 안에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권징의 필요성을 가르칩니다(고전 5:4-5).
이 장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첫째, 교회 안에 심각한 죄가 들어왔습니다(고전 5:1). 둘째, 교회의 문제는 그 죄를 슬퍼하지 않고 교만하게 방치한 데 있었습니다(고전 5:2). 셋째, 바울은 교회의 권징을 명령하며 그 목적이 영혼의 구원에 있음을 말합니다(고전 5:3-5). 넷째,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비유로 죄의 전염성을 경고합니다(고전 5:6).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으므로 묵은 누룩을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고전 5:7-8). 여섯째,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형제라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죄와의 단절을 명합니다(고전 5:9-13).
고린도전서 5장의 핵심은 교회의 거룩입니다. 교회는 죄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인을 환영해야 하지만, 죄를 정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상한 자를 품어야 하지만, 회개 없는 악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은혜의 집이지만, 그 은혜는 거룩을 낳는 은혜입니다.
특히 바울은 교회의 거룩을 십자가와 연결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의 중심입니다(고전 5: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성도의 윤리는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거룩은 율법주의적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두 가지 유혹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기준을 따라 죄를 가볍게 여기며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거룩을 잃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회복의 길을 막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길을 모두 거부합니다. 그는 죄를 엄중히 다루지만, 그 목적은 영혼의 구원입니다(고전 5:5). 그는 공동체의 정결을 요구하지만, 그 근거는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고전 5:7).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5장은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죄 앞에서 애통하십시오. 묵은 누룩을 버리십시오.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공동체답게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살아가십시오. 회개하는 죄인을 품되, 회개하지 않는 죄를 방치하지 마십시오.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되,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질서를 지키십시오. 권징을 두려워하되 포기하지 말고, 언제나 사랑과 회복을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성도 개인에게도 이 말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 안의 적은 누룩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타협, 작은 음란, 작은 탐욕, 작은 교만, 작은 거짓을 방치하면 그것이 영혼 전체를 부패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다면, 나는 묵은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성도는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살아야 합니다(고전 5:8).
고린도전서 5장은 불편한 말씀이지만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교회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가 세상의 누룩에 삼켜지도록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말씀 앞에서 두려움과 소망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두려워하고,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의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