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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15-26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 요한복음 4장은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장면을 통해 구속사의 흐름이 어떻게 유대 중심에서 열방으로 확장되는지를 드러내며, 인간의 본질적인 갈망과 하나님의 참된 예배에 대한 계시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15절부터 26절까지는 이 대화가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본문으로, 외적인 물의 갈증에서 내면의 죄, 참된 예배,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계시로 나아갑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을 향해 어떻게 다가오시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감추어진 상처를 드러내시는 주님 15절에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서 무엇인가 참된 것을 느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물리적인 물을 생각하며 자신의 수고와 피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 깊은 말 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묻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피곤한 현실보다 더 깊은 차원, 곧 그녀의 영혼을 향해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갑작스레 말씀을 전환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말씀은 전혀 새로운 주제를 꺼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여인이 진짜로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목마름의 근원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의도적 개입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외면보다 내면을 보시며, 문제의 핵심을 찌르십니다. 단순히 물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여인의 무너진 정체성과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한 일하심입니다. 17-18절에서 여인은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예수님은 그녀의 삶을 폭로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은 단정적입니다. 'πέντε γὰρ ἄνδρας ἔσχε...

요한복음 4:10-14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4장 10절부터 14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대화는 단순히 물을 요청하고 대답하는 차원을 넘어, 구속사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향해 어떻게 복음을 풀어내시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여인의 갈증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메마르고 피폐한 상태에 있는지를 꿰뚫어 보셨고, 그 속에 영원한 생수를 부어주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생수에 대한 은혜로운 초대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여기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두 가지를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둘째는 '네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헬라어로 'δωρεὰν τοῦ θεοῦ(도레안 투 데우)'로,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가리킵니다. 이 문맥에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며, 그분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여인이 오히려 예수께 구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갈증과 공허함을 인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여인은 아직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그분을 단지 유대인 남성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녀 안에 숨겨진 갈망과 목마름을 알고 계시며, 그 깊은 곳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생수(ὕδωρ ζῶν)...

요한복음 4:1-14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메마른 인생에 생수를 주시는 주님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올라가시는 도중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면서 수가라 하는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계획된 구속사의 한 장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는 보편적 복음임을 드러내는 핵심 본문입니다. 특히 1-14절은 목마른 인생에게 참된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초월적인 구속 능력을 증언합니다.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가신 예수님 본문 1-3절은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게 된 상황을 배경으로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제자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1절).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갈등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시고 사역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이때 주목할 구절은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헬라어로 'δέ'와 'ἔδει'가 결합된 이 구절은 단순한 지리적 경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ἔδει(에데이)'는 신적 필연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셔야만 했던 이유가 단지 지리적 효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필연적인 여정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은 한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수가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 6절은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시간은 '제육시쯤', 즉 유대 시간으로 정오 무렵입니다. 이 시간에 여인이 물을 길러 온다는 것은 이 여인이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보통 여성들은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공동으로 물을 길러 나...

요한복음 3:31-36 위로부터 오신 이의 증언

  위로부터 오신 이의 증언 요한복음 3장 마지막 단락인 31절부터 36절은 요한복음 전체의 복음 신학을 농축하여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혹은 요한복음 저자의 신학적 선언으로 볼 수 있는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분의 증언이 왜 절대적인지,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와 거절하는 자의 운명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이해는 이 본문을 통해 뿌리 깊은 신학적 통찰로 이어집니다. 위에서 오신 이와 땅에 속한 자 3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느니라." 이 구절에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ἄνωθεν'은 '위로부터' 혹은 '하늘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는 요한복음 3장에서 이미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용된 바 있습니다(요 3:3). 예수는 단지 예언자나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위에 계신 분이며(ἐπάνω πάντων), 시간과 공간, 피조 세계 전체를 초월하여 계시는 분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표현이 바로 '땅에서 난 이', 곧 인간들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극명한 신학적 대조를 세웁니다. 인간은 땅에서 나고, 땅의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 안에 생명이나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없는 존재이며, 참된 진리는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진리를 정의하려 하거나, 인간적인 이해로 복음을 해석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복음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이지, 아래에서 올라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그분의 근원과 본질, 곧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서 권위를 갖습니다. ...

요한복음 3:22-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장 22절부터 30절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요한과 예수의 사역이 동시에 이루어지던 시기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역사적 전환점을 넘어서, 구속사의 중심이 어떻게 인간의 자리를 넘어 오직 그리스도께로 이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은 제자도를 말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참된 겸손과 사명의식의 본을 제시합니다. 예수와 요한의 사역이 나란히 있을 때 22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셔서 거기서 함께 머무르며 세례를 베푸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기록상 처음으로 예수님이 세례를 직접 베푸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4장 2절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했다고 보충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의 사역이 요한보다 더 광범위하게 확장되었음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23절에서 요한도 아직 애논에서 세례를 계속 베풀고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애논은 물이 많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경쟁이나 대립의 의미가 아니라, 사역의 목적이 명확한 두 사명의 교차점이었음을 의미합니다. 24절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이 시기의 역사적 정황을 짚어줍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투옥되기 전이기에, 요한과 예수의 사역이 겹쳐 있는 특별한 시기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는 두 사역의 목적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기심에서 나온 논쟁, 그러나 요한의 시선은 위를 향한다 25절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인 사이에 정결 예식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논쟁(ζήτησις)'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격렬한 신학적 토론을 나타냅니다. 세례의 의미와 정결함의 문제는 단지 종교적 의식의 수준...

요한복음 3:20-21 빛을 피해,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인간

  어둠과 빛 앞에서 드러나는 진실 요한복음 3장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로 시작하여, 인간의 구원에 대한 깊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중 20-21절은 그 대화의 결론부에 해당하며,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그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합니다. 빛이 오셨으나,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인간 본문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하며."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φαῦλα πράσσων(파울라 프라쏜)"으로, 단순한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타락한 행위, 곧 하나님과 관계 없는 자의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빛 대신 어둠을 더 사랑하는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빛을 미워하여(because they hate the light)"라는 표현은 중립적인 회피가 아닌, 적극적인 반감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빛이 자신들의 죄악을 드러낼 것을 두려워하여 빛을 거부합니다. 이 말씀은 단지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존재 전체가 노출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단순한 행위의 문제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스스로를 어둠에 숨기려는 존재임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회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저항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인은 단지 실수한 사람이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린 자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온다 21절은 반대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여기서 '진리를 따르는 자(ὁ δὲ ποιῶν τ...

요한복음 3:17-18 묵상, 예수님이 오신 이유

  정죄가 아닌 구원의 목적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복음 앞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7절과 18절입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운명이 얼마나 극명하게 갈리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1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정죄와 멸망에 있지 않고, 구원과 생명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보내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apesteilen 으로, 이는 사도라는 단어 apostolos 와 어원이 같은데, 단순한 파송이 아니라 사명과 목적을 갖고 보낸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단순히 세상에 진리를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세상'(헬. kosmos )은 단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된 죄 가운데 있는 인류 전체, 즉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로서의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심판에서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려 한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심에서는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 오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율법처럼 이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짐처럼 받아들이지만, 주...

요한복음 3:16-21 묵상,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너무나 익숙해서 감동 없이 지나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그런 말씀 속에 복음의 핵심이 가장 선명하게 담겨 있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뿌리와 중심이 되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외우기 쉬운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 전체를 요약하며,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생명의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 그리고 빛과 어둠의 실재를 다시 마음에 새기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를 주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16절 상반절)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요약한 한 문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이라는 표현에서 ‘세상’(헬. kosmos )은 단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 사회 전체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어진 이 세상을 향해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처럼’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houtōs 로, 사랑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곧 독생자를 주시는 방식으로 나타난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감정적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독생자’(헬. monogenēs )는 ‘유일한 존재’, 곧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라는 가장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방식으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며,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은혜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 하반절)는 말씀은 복음의 목적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구원의 열매가 맺힙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요한복음 3:11-15 묵상,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마음에는 수많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나는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요한복음 3장 11절부터 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이어가시며, 믿음의 본질과 구원의 핵심을 친히 가르쳐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복음의 중심입니다. 위의 것을 말하거늘 믿지 아니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우리는’이라는 복수형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과 구약의 선지자들, 또는 예수님과 삼위 하나님의 일치를 포함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아는 것’,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적 추측이나 사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고 경험하신 분으로서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증언을 사람들은 받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받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헬라어 ‘λαμβάνετε’( lambanete )로 단순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의지적인 거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불신앙의 현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때로 말씀을 듣지만, 삶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흘려보낼 떄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는 귀는 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은혜를 놓치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지만,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깊이 아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 ‘땅의 일’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

요한복음 3:5 묵상,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인생을 살다 보면,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깊은 공허를 경험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여전히 믿음의 확신과 기쁨이 희미한 경우,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인가? 나는 거듭났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요한복음 3장 5절의 말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해답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남의 본질, 물과 성령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문자적인 반응에 대해 다시금 진리를 강조하시며 “진실로 진실로”(헬. ἀμὴν ἀμὴν, amēn amēn )로 시작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라는 의미이며, 영적 생명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임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나다’입니다. 헬라어로 ‘γεννηθῇ’ ( gennēthē )는 수동태로 사용되어, 거듭남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곧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분명히 합니다. ‘물과 성령’은 거듭남의 이중적 요소를 표현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지만, 가장 개혁주의적인 해석은 이 둘을 하나의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물과 성령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작용하는 하나님의 정결과 재창조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물’은 구약에서 정결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에스겔 36장 25-27절에서 하나님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동시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의 개념을 배경으로 합니다. 즉, 정결함과 새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물...

요한복음 3:4 묵상, 어떻게 그런 일이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신앙의 세계에 처음 들어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도 니고데모처럼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4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혼란스러워진 니고데모의 솔직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이 질문은 단지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며,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생명의 길이 얼마나 전혀 다른 방식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율법적 사고의 한계 속에서 나온 질문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가장 철저히 연구하고 실천하던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문자와 율법의 조항에 대해 박식했고, 종교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경건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니고데모조차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니까?” 여기서 ‘늙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geron 인데, 단순한 나이 듦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한계와 고정된 삶의 구조를 뜻하기도 합니다. 니고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제 나이도 많고 삶의 궤도도 이미 결정된 사람이 어떻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이 표현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듭남’—헬라어로 gennēthē anōthen , 즉 ‘위로부터 나는 것’—을 육체적인 출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니고데모가 둔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이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율법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반응은 ...

요한복음 3:1-3 묵상, 니고데모의 갈망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때로는 익숙함 속에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교회도 다니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하고 있는지, 나는 정말 구원받은 자로서의 새 생명을 누리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이런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 ‘거듭남’이라는 신앙의 핵심을 깊이 있게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요구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그 속에 감추어진 갈망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1절) 니고데모는 단순한 유대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유대사회에서 종교적, 사회적 권위를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경건한 자였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여기서 ‘밤에’(헬. νυκτός, nyktos )라는 표현은 단지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종종 영적 무지, 두려움, 신앙의 갈등 상태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니고데모는 외적으로는 지도자였지만, 내면에서는 어떤 두려움과 질문,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선생’(헬. διδάσκαλος, didaskalos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존경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고백이라기보다는, 기적과 표적에 대한 감탄에 머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신앙은 아직 ‘보는 믿음’이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인정은 하되,...

요한복음 3:1-21 묵상, 니고데모와 거듭남의 비밀

  거듭남과 영생의 복음을 위하여 인생을 오래 살아온 분들도,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들도 어느 순간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진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가?"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주신 친절하고도 분명한 대답입니다. 니고데모라는 한 율법 교사와의 깊은 밤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거듭남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영생의 복음에 대해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며, 우리도 그 빛 가운데서 참된 생명의 길을 다시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 그리고 주님의 대답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1-2절) 니고데모는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의 일원이었습니다. 율법에 능통했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수님의 권세에 끌려 조심스럽게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그 고백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표적과 능력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예수님의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자부심 속에 살았고,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격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지식이나 행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새로운 생명, 즉 거듭남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9-22 묵상,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구속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22절까지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상징적인 선언이며, 하나님의 성전 개념이 완전히 새롭게 전환되는 중요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성전, 참된 임재, 참된 소망을 깊이 붙들게 됩니다. 성전의 오해와 예수님의 선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성전 정결 사건을 보고 물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의심하며 증명을 요구한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이 말씀은 매우 도전적인 선언입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이 재건한 건축물로, 약 46년 동안 공사된 웅장한 구조물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그 성전을 허무는 것도, 다시 세우는 것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며 반문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20절)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친절하게 해석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이며,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야 제자들이 깨달은 진리였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예수님의 이 선언은 단순...

요한복음 2:17 주의 전을 위한 열심

  주의 전을 위한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조용한 순종이 필요할 때가 있고, 또 때로는 뜨거운 열정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조용한 순종은 인내와 겸손의 열매라면, 뜨거운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불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말씀, 요한복음 2장 17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제자들이 떠올린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성과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깊은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열심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은 매우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셨을 때, 그곳은 더 이상 예배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성전 뜰, 특히 이방인의 뜰에는 소와 양을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성전은 기도의 집이 아니라, 거래와 이익의 공간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고 격노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러고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 2:16) 이때 제자들은 구약의 시편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이다.”(시 69:9) 요한복음 2장 17절은 이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이 행동이 단지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위한 신적인 열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열심’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젤로스(zēlos)’인데, 이는 단순한 감정의 열기가 아니라, 진리를 위한 헌신적 집념,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질투와도 같은 강력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열심은 단순히 종교적 개혁...

요한복음 2:23-25 묵상,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시니

  예수께서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시니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과 행동을 보며 판단하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부터 25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시는 기준이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믿음을 다시 돌아보고, 참된 신뢰와 순전함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소망합니다. 기적을 보고 믿은 자들 본문은 유월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3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후,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놀라운 이적들을 나타내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능력을 보며 놀랐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었다’는 말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도 이 믿음은 단지 감탄이나 신뢰의 정도에 머무는 개념으로 쓰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적과 표적에 반응하여 겉으로는 믿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 그 믿음의 중심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따르는 믿음은 처음에는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따르던 때가 있었지만, 그분이 고난을 말씀하실 때는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 표적에 반응한 믿음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얕은 흙에 뿌리내린 씨앗처럼, 햇볕이 나면 금세 말라버릴 수 있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는 감사하며 따르다가, 응답이 더딜 때는 원망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이지요. 기적을 통해 믿음을 시...

요한복음 2:13-22 설교 예수님의 열심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예수님의 열심 요한복음 2장 13절부터 22절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 중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지만, 요한은 이 사건을 사역의 시작 부분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 사명의 방향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본문은 단순한 분노의 장면이 아니라, 예수님이 참 성전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드러냅니다. 유월절과 성전,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획 본문은 유월절이 가까운 시점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전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13절)라는 이 말씀은 시간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은혜를 기념하며, 하나님의 구속을 회상하는 절기입니다. 바로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신 것은, 구약에서 예표된 유월절 어린양이 실제로 성전 가운데 임하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장소는 '성전(히. 나오스, 헬. 히에론)'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단어는 히에론으로, 전체 성전 구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공간은 이방인의 뜰로,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상인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거래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사행위 그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 공간에서, 인간의 탐욕과 종교적 타락이 공공연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목도하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15절)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보여줍니다. 단순한 분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거룩을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하늘의 심판적 개입이...

창세기 33:5 설교, 야곱의 자녀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녀, 복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품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주시는 약속은 언제나 분명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창세기 33장 5절의 말씀은 자녀를 축복하기 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하나님이 친히 응답하시는 은혜의 언어입니다. “이에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자녀를 통해 복을 허락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야곱의 고백, 은혜로 받은 자녀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 중 형 에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20여 년 전, 장자권을 가로채고 도망친 그 과거가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복강에서 야곱과 씨름하시며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시고, 과거를 끊고 새 사람으로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형과의 감격적인 화해가 이루어지며 본문 말씀이 등장합니다. 에서가 야곱의 가족을 보며 묻습니다.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이 질문은 단지 정보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야곱이 지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여정 속에 어떤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는지를 묻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짧지만 깊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야곱은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자녀가 단지 자신의 수고의 결과나 아내들과의 결혼 생활의 열매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자녀를 바라보는 모든 어머니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자녀는 내 손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보내주신 복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어머니는 자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향한 바람과 기대...

시편 127:3 설교, 생명의 선물, 하나님의 기업

  생명의 선물,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기적 앞에 선 가정은 참으로 복된 가정입니다. 임신과 출산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오늘 시편 127편 3절 말씀을 통해, 새 생명을 기다리는 성도님의 가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과 위로, 사명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이 말씀은 단지 정보가 아니라,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요 축복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먼저 본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자녀는 부모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곧 유산이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기업’으로 번역된 단어는 ‘나할라’인데, 이는 하나님의 손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주어진 분깃, 몫, 유업을 의미합니다. 자녀는 결코 우연히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 안에 계획되었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 생명이 자라납니다. 이 말씀은 임신 중인 지금 이 시기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담은 귀한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중에 있는 아기도 이미 하나님 앞에서는 ‘기업’입니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생명을 아시고, 이미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부모는 그 기업을 위탁받은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내 소유물처럼 자녀를 여기기 쉽지만, 말씀은 분명히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부모의 마음에 큰 안식이 임합니다. 출산을 앞두고 여러 가지 걱정과 염려가 들 수 있습니다. 건강 문제, 양육 문제, 경제적 문제 등 많은 것이 마음을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 생명을 지키고 양육하는 일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안이 있...

심방설교, 개업, 여호수아 1:9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개업은 인생의 큰 전환점입니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고,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그 지점에서 성도는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은 그러한 순간에 우리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며 약속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성도에게 꼭 필요한 이 말씀을 함께 깊이 새겨보기를 원합니다. 여호수아가 맞이한 새로운 시작 여호수아 1장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로 여호수아가 세워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전까지는 모세의 조력자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 자였지만, 이제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은 여호수아에게 있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눈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막혀 있고, 그 너머에는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쟁, 갈등, 지도력의 부담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이 말은 단순히 용기를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느냐.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느냐"는 말씀을 근거로 한 담대함입니다. 여호수아가 맞이한 새로운 사명은 오늘날 성도가 개업이라는 새로운 길을 시작할 때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 새로운 환경, 앞날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쉽게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동일한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담대함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단순히 감정을 조절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감정을 이기는 믿음, 불확실함을 뚫고 나아...

개업 심방설교, 시편 127:1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업

  하나님이 세우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을 도모하고 계획하는 수준을 넘어서, 신앙의 고백이 깊이 스며든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127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이 짧은 구절은 인간의 모든 수고와 열심이 아무리 정교하고 성실할지라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면 무너지고 만다는 진리를 선언합니다. 인간의 수고와 하나님의 주권 사업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고, 시장을 조사하고, 자본을 준비하며,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게으름을 미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모든 수고를 하나님 없이 시작한다면 그것은 "헛되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헛됨'은 단순한 실패나 손해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헛됨은 창조 이후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겪게 된 실존적 무의미를 말합니다. 아무리 일하여도 열매가 없고, 쌓아 올려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운명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이 쓴 시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성전을 건축했던 왕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기를 경험한 자입니다. 그런 그가 "여호와께서 세우지 않으면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기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입니다. 그는 모든 부귀와 영화, 지혜를 가졌지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려는 성도에게 이 말씀은 엄중한 경고이며 동시에 위로입니다. 인간의 수고가 무력하다는 경고이자, 하나님께 맡기면 헛되지 않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워지는 구조물 본문에는 두 가지 구조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집...

요한복음 2:11 묵상, 가나에서의 처음 표적, 드러난 영광

  처음 표적, 드러난 영광과 믿음의 시작 요한복음 2장 11절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키신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그 기적의 본질적 의미를 요약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짧은 한 절 속에는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 표적의 목적,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이 처음으로 드러내신 영광이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반응을 요구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표적의 의미: 시작이자 선언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헬라어: 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이라 부릅니다. 이는 단순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건이 어떤 더 깊은 실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표적은 표면에 보이는 사건보다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에 초점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사건을 “첫 표적”(ἀρχὴν τῶν σημείων)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첫’(ἀρχὴν)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간상의 처음이 아니라, 기원, 근원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넘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본질을 갖고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와도 같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방식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표적은 갈릴리라는 주변부에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성대한 공개 장소가 아닌, 시골 마을의 작은 잔치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점은 주님의 사역이 어디서 시작되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은 중심부보다 주변부에 먼저 스며들며,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시작됩니다. 이 첫 표적은 단순히 ‘와, 신기하다’고 말할 만한 기적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

요한복음 2:10 묵상, 더 좋은 포도주

  가장 좋은 포도주는 나중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0절은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가운데 등장하는 짧은 구절이지만,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복음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연회장의 입을 통해 드러난 이 선언은 단순한 잔치의 감탄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와 구속사의 순서를 보여주는 깊은 신학적 진술입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함께 살펴보며 복음의 은혜를 다시 새기고자 합니다. 일반적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 연회장은 예수님이 바꾸신 포도주를 맛보고 놀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여기서 ‘좋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칼론’(καλὸν)으로 단순히 맛이 좋다는 의미를 넘어, 고귀하고 탁월하며 질적으로 뛰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낮은 것’은 ‘엘라소스’(ἐλάσσω)로 ‘더 못한 것, 질이 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연회장은 당시 잔치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례를 말합니다. 손님이 처음 왔을 때는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취한 후에는 맛을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질 낮은 포도주를 내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잔치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뒤늦게 등장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풍속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대조하는 상징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었고, 율법 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표요, 그림자였을 뿐, 진짜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나중에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장 좋은 것을 숨기신 것이 아닙니다. 때가 참되었을 때, 바로 그 완전한 구원의 실체를 드러내...

요한복음 2:6 묵상, 정결의 항아리가 은혜의 항아리로

  정결의 항아리, 은혜를 담다 요한복음 2장 6절은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벌어진 놀라운 사건의 한가운데 등장합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이 한 절은 기적을 위한 배경 정보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와 복음의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는가? 왜 하필이면 정결 예식에 쓰이는 돌 항아리였는가? 오늘 우리는 이 한 절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정결의 의미를 함께 묵상해보려 합니다. 정결 예식의 의미와 한계 먼저 본문은 이 항아리들이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놓여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레위기와 민수기, 그리고 전승된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라 다양한 정결 규례를 따랐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손을 씻거나 식사 전에 몸을 정결케 하는 의식은 단순한 위생을 넘어서, 율법의 순종과 거룩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정결에 불과했고, 마음의 죄나 내면의 부패까지 씻을 수는 없었습니다. ‘정결 예식’이라는 말은 히브리 전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죄의 본질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대에 와서는 이 정결 규례가 오히려 외식적인 형식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외적인 정결은 신앙의 본질을 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에 등장하는 항아리는 바로 그 율법적 정결의 상징입니다. 헬라어로 ‘항아리’는 ‘ἄγγος’(앙고스)이며, 본문에는 ‘돌 항아리’(λίθιναι ὑδρίαι)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도자기보다 더 무겁고 단단하며, 부정한 것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돌로 된 용기를 사용...

요한복음 2:1-11 묵상,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첫 표적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기적으로 기록된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입니다. 단순히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를 회복시키는 사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복음의 상징이며, 요한복음 전체의 표적 신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복된 주님의 사역의 시작은 창조적 능력입니다.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가나의 혼인잔치와 인간의 결핍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1절) 여기서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은 앞선 1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간 흐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구조를 모티프로 삼아 첫 장에서부터 시간의 흐름을 세밀히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새 창조’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유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행사였습니다. 이 잔치는 단지 두 사람의 결혼식이 아니라, 두 가문의 명예와 지역 사회의 결속을 나타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잔치 전체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포도주는 단지 음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 축복,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시편 104편 15절에서는 포도주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께 나아가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합니다(3절). 여기서 마리아의 요청은 단순히 상황의 전달이 아니라, 예수님께 뭔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기대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

요한복음 1:51 묵상,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리라 요한복음 1장 51절은 나다나엘의 신앙 고백 이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요한복음 1장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닌, 구속사의 핵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보여주는 심오한 계시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하나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는지를 깊이 있게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야곱 사건을 상기 시키심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알려 줍니다. 인자 위에 임하는 사닥다리: 야곱의 꿈의 성취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이 말씀은 분명히 구약의 한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을 때, 그는 꿈속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고,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을 새롭게 하셨고,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며 베델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사닥다리가 바로 자신임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즉,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통로,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참된 중보자가 바로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예수님이 자주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신 호칭으로, 다니엘서 7장에서 인용된 표현이며,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이자 종말적 통치자로서의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떤 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구속사의 핵심 선언입니다. 야곱이 보았던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는 단지 하나의 예표에 불과했고, 이제 그 예표가 실제로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길이 되신...

요한복음 1:49 묵상, 나다나엘의 예수님을 향해 고백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장 49절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해 고백한 말씀입니다. 단 한 마디 고백 속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고, 이 고백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예언과 메시아 기대 속에서 나온 신학적인 고백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또 우리 입술의 고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해 보니다. 신앙 고백의 시작: 예수님에 대한 인식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이 고백을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는 한 마디 말씀 앞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셨을 때,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심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즉시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직감이나 감정의 반응이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잘 알고 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을 통해 그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단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본질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신 분임을 인정하는 선언입니다. 헬라어로 ‘하나님의 아들’은 ‘호 휘오스 투 데우’(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로,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본질을 함께하시는 분으로 이해됩니다. 나다나엘은 또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이라 부릅니다. 이는 유대 백성이 고대하던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를 향한 고백입니다. 구약의 메시아 기대는 ‘왕’의 이미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에서는 “정사와 평강의 왕”이 나실 것을 예언했고, 스가...

요한복음 1:48 무화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부르시는 주님 요한복음 1장 48절은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 중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예수님의 신적 통찰과 부르심의 은혜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단순한 장소 묘사를 넘어 구약적 상징과 유대 전통 속에서 깊은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부르시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자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나다나엘은 빌립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예수님의 이 대답은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닙니다. 이는 나다나엘의 마음과 삶, 그리고 그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보신 주님의 통찰이며, 동시에 은밀한 자리에 계셨던 나다나엘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선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기 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는 그의 질문은 인간적인 놀라움이자, 동시에 주님의 전지성 앞에서 드러나는 경외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셨다고 말씀하시며,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알기 전부터 예수님은 그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헬라어는 ‘에이돈’(εἶδον)으로, 단순히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개념을 넘어,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는 영적 통찰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의 외형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과 동기, 마음속의 갈망까지도 아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리를 아시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깊은 고민과 기대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상징성 본문의 핵심은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라는 표현입니...

요한복음 1:43-51 묵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요한복음 1장 43절부터 5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과, 그 만남 속에 담긴 깊은 영적 진리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의 부르심,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적 통찰과 선언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복음의 초대이며, 믿음의 여정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참된 인식’의 순간을 드러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점점 더 깊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개별적인 만남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부르시는 예수님, 따르는 제자들 4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구절은 매우 짧지만,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예수님의 부르심, 곧 ‘나를 따르라’는 초대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아콜루데이’(ἀκολούθει)는 명령형으로, 단순히 예수님 뒤를 걷는 것을 넘어서, 삶 전체를 그분께 맡기고 따라오라는 절대적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빌립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이는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요일 4:10). 빌립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순종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자연스러운 확산을 보게 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결코 그 감격을 혼자 간직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나눔과 증언을 통해 확장되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자라갑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

요한복음 1:35-42 묵상,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다

  예수님을 따르는 첫 걸음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42절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첫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만남이나 호기심의 결과가 아니라,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며, 인간의 내면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출발선 위에서 시작되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어떻게 변화와 사명으로 이어지는지를 깊이 살펴보게 됩니다. 어린 양을 바라본 두 제자 35절에서 36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또 한 번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표현이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미 29절에서 한 번 선포한 동일한 말씀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선언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임을 말해줍니다. 이 선언을 들은 두 제자는 즉시 반응합니다. 요한복음 1장 37절은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복음의 능동성과 제자의 결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듣고’ 그리고 ‘따라갔다’는 두 개의 동사는 복음에 대한 바른 응답의 순서를 보여줍니다. 먼저 복음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그 듣는 말씀에 ‘반응’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삶의 시작입니다. ‘따라갔다’는 동사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έω)는 단순한 뒤따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전적 헌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을 포함한 결단입니다. 이 단어는 이후 신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삶을 묘사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된 다음에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이해...